생명의 문과 길을 선택하세요 마태복음 7:13-14 제가 서울에서 제주로 온 지가 이제 20년이 좀 넘었습니다. 2003년도 12월 4일날에 에 제주에 왔고 그리고 인제 지금까지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가끔 이제 서울에 올라갈 때가 있습니다. 네 올라가면은 예전에 그렇게 신방을 다니면서 익숙했던 거리들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특히 지하철 같은 경우를 타기 위해서 들어가게 되면은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잘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서 또 다른 길을 찾아서 나오는 그런 일들도 있게 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이제 우리에게는 어떤 길을 가야 되는가? 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왼쪽으로 가야 하는지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지 우리에게 불분명하여서 때로는 힘들 때도 있습니다. 좀 더 쉬운 길을 택해서 가기를 원하기를 원하고 있고요. 그리고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길을 우리는 되도록 선택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런 갈등 가운데서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게 됩니다. 갈등이라는 것은 여러분 우리가 한문으로 보면 ‘칡 갈’ 자를 씁니다. 그러니까 이 칙이 뒤엉켜지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무엇을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매우 어려운 상태를 가리켜서 우리는 갈등이라고 말하기도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잠시 멈추어 섭니다. 그리고 좌우를 둘러보게 되죠. 내가 이 길을 가야 하는지 저길을 가야 하는지 내가 좌측으로 가고, 때로는 우측으로 가야 하는지 아니면 되돌아가 가야 하는지. 우리는 이런 선택에 많은 어려움을 때로는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사실 그런 것입니다. 끊임없는 선택 가운데 이뤄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 선택이 옳은 선택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른 선택이기도 지혜로운 선택이기도 하고 어리석은 선택이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이 서 돌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어서 때로는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죠. 왜냐하면, 그 길을 계속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는 유익하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길을 아무리 오래 걷고 오래가고 그 길을 아무리 빨리 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간 길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빠른 길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바른길을 가야죠. 아무리 빨리 간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원하지 않는 길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라면 우린 그 길을 아무리 갔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우리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고. 많은 에너지를 낭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마지막 7장 13절 14절 말씀 이렇게 말합니다. 좁은 논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거는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대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논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라는 말씀을 합니다. 좁은 문이 있고 넓은 문도 있습니다. 좁은 길도 있고 넓은 길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을 어떤 문을 선택할까요? 넓은 문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넓은 길을 선택하게 그것이 행복이라고 느끼기도 하고 또 많은 사람이 그런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나도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좁은 문이나 넓은 문 좁은 길이나 넓은 길 특별히 우리에게 넓은 문 넓은 길이 멸망의 길과 멸망의 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좁은 문 좁은 길을 선택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길이요. 그것이 행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이런 선택의 갈림길에서 넓은 문을 선택하고 넓은 길을 선택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문과 길은 멸망과 불행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좁은 눈과 좁은 길을 선택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이 벽과 같은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막혀 있습니다.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벽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의 많은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고난 역경 절망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요?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요 앞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에서 서울대 명예교수인 정현채 교수가 와서 죽음학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죽음학 강의를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정영철 교수는 의사이며 서울대에서 교수로 지냈던 분입니다. 근데 그분은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죽음학 강사입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에서도 죽음에 대해 강의를 하고 그 학생들이 많이 그 강의를 듣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는 웰 다잉 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도 중요하지마는 어떻게 죽는가 어떤 죽음을 맞이하느냐고 하는 것은 사실 더 중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현채 교수가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죽음은 어떤 사람에게는 벽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무늬일 수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럴 수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죽음은 절망일 수 있어요.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 죽음은 새로운 인생을 걸어가는 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 그분이 기독교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강의 가운데서 저는 기독교적인 죽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음은 벽일까요? 문일까요? 문입니다. 왜냐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음은 절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천국의 삶으로 들어가는 가는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에게서의 죽음은 천국으로 향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수많은 벽이 있습니다.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벽은 우리에게 절망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는 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벽과 같은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문을 여는 기회를 얻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벽과 같은 상황 속에서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 문을 열고 나아가는 그래서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내가 곧 길이오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린 모두 죽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끝내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근데 어떤 사람에게 그 죽음은 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은 또 다른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 하나님이 예배하신 천국의 문으로 돌아가는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종 한라산을 정상을 가기 위해서 올라갔는데 정상에 못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못 가고 윗세오름까지만 갔던 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왜 그럴까요? 거기까지예요. 1700고지인가요? 거기까지밖에 갈 수 없어요. 어리목으로 가거나 영실로 올라가면은 정상에 올라가지 못합니다. 왜냐면, 거기는 막혀 있어요. 정상에 가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관음사코스나 성판악으로 가야됩니다. 그런데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종종 그것을 몰라요. 예전에 서울에서 내려온 제 아는 지인이 정상을 못 갔대요. 왜 그러냐니까 영실로 올라갔다는 거예요. 그래서 물어 보지 그랬냐고 정상을 갈라면은 거기로 가면 안 된다고 근데 몰란 거예요. 그냥 코스 있어서 그냥 그리로 올라가면은 정상에 가는 줄 알은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 천국에 가는 길은 그런데 한라산 가는 길과 달라요. 관음사가 올러갈 수도 있고 성판악으로 올라갈 수 있는 여러 개의 길 중에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길 하나님께 가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유일한 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예수 그리스도로 만나지 않고는 그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진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진리 안에서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은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고는 영원은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바로 그것은 예수 크리스도 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 가는 길 천국의 가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우리가 무엇을 이해해야 되는가? 라는 거예요.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열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2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가장 소중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종종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이 영광 이르지 못하되니 그리고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고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책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 지혜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접한다는 말과 믿는다란 말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접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환대하는 것입니다. 환영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집인 하나님의 집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며 우리를 초대합니다. 함께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느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 얘기로 돌아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두드리는 문 마음의 문은 밖에는 문고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안에서만 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놓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신 분위기 여러분 믿음에 확신이 없으신 분이 있다면 오늘 마음의 문을 여셔야 합니다. 지금 저를 통해서 전해지는 이 말씀은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녹화하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생명의 연합이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내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영원히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나와 동행을 하십니다. 때는 권한과 역경 속에 있을지라도 때로는 인간적으로 낙심과 절망 가운데 있을지라 때로는 치유할 수 없는 질병에 걸렸을지라도 내가 실패하고 내가 넘어졌을지라도 그 예수님은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나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가라?는 거예요. ‘예수님 저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감사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믿고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은 아예 구원자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내 삶에 들어와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아가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모셔 드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 내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구주로 모셔 예순 말미암아 나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한 천국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 예수 내 안에 들어오시고 나와 영원히 나를 떠나지 않는 그 하나님의 걸어가는 해를 경험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믿음에 확신이 없고 구원 확신이 흔들리는 분들은 이 기도를 따라 하셨으면 합니다. 이 기도를 아주 짧은 기도지마는 이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셔드리는 기도입니다. 간단한 기도가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문이요. 새로운 길이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함께 따라 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내 믿음이 흔들리거나 구원의 확신이 없거나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은 가슴에 손을 좀 얹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를 따라서 이 기도를 하셨으면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함께하겠습니다. 예수님 저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감사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믿고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을 나해 구원자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나의 삶에 들어와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아가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러분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해 예수 크리스토를 영접하면 예수는 내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릴 위해서 예비하신 풍성한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시고 우리는 내가 예수 크리스도를 영접한 자로서의 걸어간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해야 됩니다. 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우리가 부모에게 대화를 요청하고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부모의 보호와 인도 안심을 받는 것처럼 기도는 그렇게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필요를 공급하실 뿐만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우릴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적인 양식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잘 먹으면요 잘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읽는데 가장 좋은 것은 요한복음부터 읽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교회에 지속적으로 출석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교회는 믿음의 성장을 돕고 행복한 삶을 격려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 캐릭터를 영재발신뿐만 아니고 우리의 성도들도 구원에 확신을 가지시고 이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또한 교회에 지속적으로 또 출석하면서 믿음의 성장을 경험하고 또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를 지지하는 그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경험되어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을 환영하고 또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주한에서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며 또 하나님이 주신 나라를 천국을 소망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