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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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나를 누구라 하느냐 1(막 8:27-38)2024-10-06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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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복음 8:27-38


기독교 그리고 유대교 또한 이슬람의 차이를 여러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나기도 하고 다른 부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고백에서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습니다. 탁월한 유대의 랍비 정도로만 여기고 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크리스토를 누구로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으로 믿고 있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슬람이나 유대교와 기독교의 핵심적인 차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로 믿느냐 어떤 분으로 고백하느냐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대답은 여러분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은 누구인가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또한 대답은 예수님은 누구라고 하는 대답입니다. 왜냐하면, 그 대답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지방을 지나가시다가 제자들과 함께 여행하는 중에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28절은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했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이라고 말한 것은 예수께서 회개를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아라고 한 것은 열정적으로 죄를 책망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선포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질문하셨습니까?

29절은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으며,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주라고 하는 것은 헬라어로 라는 말인데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주는 그냥 호칭입니다. 당신이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영적인 것으로 구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대답 중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것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이고. 이것은 히브리어로는 메시아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직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님의 직분이 무엇인가? 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삼중직으로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선지자인 것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시며 복음을 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이어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속죄의 재물 희생의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구속이라고 말합니다. 왕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한 베드로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질문과 대답에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입으로 하는 대답이 있고 삶으로 하는 대답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포도원의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가 두 아들을 불러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첫째, 큰아들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예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포도원에 가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입으로는 대답을 했지만, 행동으로는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먼저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할 것을 이야기하자 싫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이 둘째, 아들은 포도원에 가서 일하게 됩니다. 그는 입으로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승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행동으로 응답했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온 하다 보면 입으로 하는 대답이 있고 삶으로 하는 대답이 있다는 거예요. 입으로 하는 응답이 있고 삶으로 하는 응답이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입으로 말하지만, 행동으로 말하지 않는 경우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신앙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입술로 고백한 것이 삶으로 이어졌을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입으로 주여주여 주여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입술로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했으면 삶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입술로 주님을 고백했다면, 삶을 통해서 예수님이 주인 되심을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입술로만 고백하는 신앙, 대답하는 신앙, 반응하는 신앙, 응답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것입니다. 내 삶은 어떤가? 라는 거예요.

 

제가 이 본문을 놓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주신 것은 대답이라고 하는 단어였어요. 입술로 어떻게 대답하느냐가 아니라 삶으로 어떻게 대답하는 삶을 살아가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을 이야기한다면, 삶으로 대답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하는 질문을 하시고 난 후에 그들에게 교훈을 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제자의 삶, 나를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입으로 대답하는 삶에 마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으로 대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에게서 발견하는 입으로 하는 대답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마가복음 819절은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이시니다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616절은 시몬은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 말은 당신은 곧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은 성경에는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에게 사람들이 너는 누구냐는 질문을 합니다. 그때 세례 요한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고 합니다. 여러분 마르다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예수께서 부활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은 예수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사도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들은 예수 크리스도를 전했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능력을 행했습니다. 예수 크리스도 그것은 복음의 핵심이었고, 그리스도 그분이 그들의 사역의 능력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느냐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109절과 10절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시인에 대해서, 즉 입술로 하는 반응, 대답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인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입술로 고백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고백적 믿음이라고 말하고 이것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 혹은 고백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마음에 믿고 마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하라고 말합니까? 입술로 고백하라고 말합니다. 시인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꼭 시키는 게 있습니다. 영접 기도입니다. 우리를 마음으로 믿는 것에 마치지 말아야 합니다. 입술로 고백해야 됩니다. 입술로 고백하고 마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으로 그 신앙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시인과 부인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누가복음 128절과 9절은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고 합니다. 나를 시인하면 너희들도 시인할 것이고. 나를 부인하면 너희들도 부인을 당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이 말이 그렇게 우리 마음에 다가오질 않아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한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생명을 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구주로 시인한다고 하는 말은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 시인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나를 시인하느냐 부인하느냐라는 것은 너의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베드로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이 시인과 부인이 반복되어 일어나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베두르는 시인에서 부인으로 또 부인해서 시인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잡히면 너희들 모두 다 도망갈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장담합니다. 모두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시인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잡혔습니다. 그리고 여중이 그에게 묻습니다. 그 러자 뭐라고 말합니까?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또 여종이 말합니다. 네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것을 안다라고 말하자 나는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종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예수님과 한패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맹세하여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여러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했던 사람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다녔던 사람이고 예수님의 위대한 능력을 곁에서 보았던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적인 교훈 무엇일까? 우리가 입술로 신앙을, 입술로 고백하는 삶에서 마치지 않아야 된다는 거죠. 그러므로 우리의 요구되는 것은 입술로 대답하는 삶에서 삶으로 응답하는 신앙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디도서 116절은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고 합니다. 그들의 하나님을 시인 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않은 자요 모두 선한 일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입으로는 시인하지만, 행위로 뭐합니까?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들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일까요? 아니에요.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고백했던 사람이에요. 시인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그것입니다. 내가 입술로 어떤 말을 하느냐 하는 거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삶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서도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죠. 많은 사람을 입으로는 유창하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담대하게 고별합니다. 그러나 막상 삶의 현장 가운데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했던 그 신앙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가증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이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에서 무엇으로 나아가야 될까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고백했다면, 그 고백적인 삶 가운데 있어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대답하는 것에서, 삶으로 대답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단순히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질문하신 것으로, 그 질문에 대답을 들으신 거로 예수께서 만족하기 위해서 이 질문을 던졌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의 그 질문을 던지신 의도가 있습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제자의 삶을 그들에게 요구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입으로 대답하는 신앙에서 삶으로 고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입습니다. 혹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조로 영접하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고백하셨다면 고백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