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4) : 두아디라 교회 요한계시록 2:18-29 오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네 번째 시간으로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 은혜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를 ‘예수님의 러브레터’ 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단순히 책망하시기 위해 보내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편지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사랑하셨기에 편지를 보내시는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8절은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두아디라에 편지를 보내시는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는 성자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주님은 불꽃같은 눈을 갖고 계십니다. 빛나는 주석과 같은 발을 갖고 계십니다. 이는 주님의 통찰력과 심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여러분을 보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것을 믿으면 어떤 생각과 생활을 하게 됩니까?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불편하실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굉장히 평안하실 것입니다. 그 차이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생각과 삶을 살고 있느냐? 아니냐? 에 있습니다. 내 생각과 마음대로 살고 싶은 사람은 매우 불편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은 평안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안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항상 여러분들과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항상 보고 계신다는 것으로 인해 불편함이 아니라 평안함이 있기를 원합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안심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먼저 칭찬을 하십니다. 주님은 무엇을 칭찬하셨습니까? 19절은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와 성도들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알고 계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두아디라에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극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아디라는 버가모에서 남동쪽으로 약 64Km 정도 거리에 있는 공업도시였습니다. 이곳은 최초로 상인들을 대상하는 조합, 즉 길드가 조직된 곳이었습니다. 이 길드는 일종의 상인들의 협동조합과 같은 것으로, 그곳에 가입을 하지 못하면 제대로 장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사를 하고 먹기 살기 위해 길드에 참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길드는 단순히 장사를 하는 것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장사가 잘 되기 위해 우상을 섬기는 행위를 함께 했습니다. 이는 재래시장 같은 곳에서 년 초가 되면 돼지머리를 놓고 절을 하고 고사를 지내고 장사가 잘 되기를 빌었던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숭배를 하는 길드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사를 하고 먹고 살며 생활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업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신실하게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섬김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기는 일이 힘들었지만 인내하며 감당을 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을 향해 그렇게 사업을 하면 망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방법으로 하고, 적당히 타협을 하면 더 사업이 잘 되고 성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비록 장사하고 먹고 살기에 힘들지만 우상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방식대로 사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생활과 사업을 하는 성도들을 향해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 고 합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유별나게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예수님께서 알아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우리는 주님이 알아주고 인정해 주시는 신앙안과 삶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두아디라 교회와 성도들은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에 있어 처음 것보다 더 많았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것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끝까지 지속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온전히 지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처음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간절하고 뜨거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예배는, 기도는, 봉사는, 전도는, 사랑은 어떠합니까? 혹시 시간이 지날수록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섬김의 자리, 헌신의 자리에서 떠나고 있지 않습니까? 어제 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올해 보다는 내년이 내년보다는 그 후년이 더 나아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칭찬을 하신 후에 책망을 하십니다.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20절은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라고 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선지자로 임명을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지자가 되었으며, 그런 여인을 인정하고 따르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이세벨은 어떻게 했습니까? 첫째, 주의 종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했습니다. 20절은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라고 합니다. 이세벨은 일반 교인들만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을 유혹하여 행음을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만들었습니다. 많은 주의 종들이 그 여인의 유혹으로 인해 육체적인 간음을 범했습니다. 또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영적 간음의 죄를 범하게 했습니다. 교회에 악하고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교회에 선한 악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악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도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세우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허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성도들에게 영적인 것만 아니라 인격적인 면에서도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회개할 기회를 거부했습니다. 21절은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세벨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하지만 이세벨은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죄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것을 원하십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은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실 때 구원 받을 기회가 있을 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6장 10절은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믿음의 가정들, 즉 교회의 영적인 가족들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기회를 놓치면 다시 잡을 수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회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아야 합니다. 죄를 죄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알고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죄를 회개할 수 있는 용기가 있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지금 우리를 향해 아직 회개할 기회가 남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회개할 기회를 거부하는 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 때 회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히개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은 이세벨과 사람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22절과 23절은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고 합니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는 이세벨을 먼저 침상에 던질 것입니다. 그와 함께 죄를 범한 사람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실 것입니다. 나아가 자녀들이 사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는 무서운 질병과 죽음으로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경은 종종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 질병과 죽음이 임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병과 죽음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죄를 생각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신 권면과 약속은 무엇입니까? 첫째, 권면입니다. 25절은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합니다. 그들을 향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너희에게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19절에서 언급하신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간직하고 지키지 못하는 악한 사탄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사람과 환경과 상황을 통해 유혹하며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가지, 우리가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굳게 잡고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더 견고해지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약속입니다. 주님은 많은 유혹과 시험을 당해도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굳게 잡고 이기는 자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 별을 주실 것입니다. 그 권세는 악한 사탄과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영적인 유혹과 미혹을 이기는 것입니다. 가장 하루 중 가장 어두울 새벽 무렵이라고 합니다. 그 때 새벽 별은 주신다는 것은 인생의 암흑과 절망에 빛과 희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인내입니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에 대한 유혹과 도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불 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것을 생각하며 끝까지 예배와 헌신과 섬김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인내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