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2) : 온유 갈라디아 6:1-2 거칠고 차가운 사람도 있고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가지게 됩니다. 어쩌면 거칠고 차가운 사람들을 가까이했을 때는 마음도 좀 불편하고 좀 힘들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의 평안하지 않은 경우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말도 듣고 행동하는 사람들과 지낸다면 우리의 마음도 편안해질 뿐만 아니라 좀 더 우리 마음도 따뜻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실 거칠고 차가운 사람들은 그런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고 또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들은 그런 인생을 살아가며 생활하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노부부의 모습은 우리에게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우리도 그렇게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2월 우리 교회에 달력을 보시면은 이런 글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유는 우리의 힘을 절제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에 서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를 낮추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마음을 가지며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본받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앤드루 머리의 ‘겸손’이라는 책의 내용에 있습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힘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서는 태도를 보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를 낮추는 것이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온화함을 본받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은 쌍둥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온유하지 않으면 겸손할 수 없고 겸손한 자가 온유한 자로 살아갑니다. 2월을 보내면서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본받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품인 이 온유함을 가지시고, 또 온유한 자로 살고,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솝 우화의 바람과 해님을 읽고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바람과 해님이 내기를 하게 되죠. 그것은 두꺼운 옷을 입고 가고 있는 사람의 옷을 누가 벗기느냐? 라는 것입니다. 바람이 먼저 시도를 하게 됩니다. 거센 바람이 불게 됩니다. 그래서 바람을 통해서 그 사람의 옷을 벗기려고 했지만, 벗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바람이 세게 불면 불수록 그 사람은 옷을 움켜쥐게 되고 절대로 그 옷을 벗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바람이 실패하자 해님이 그 사람의 옷을 벗기게 됩니다. 따뜻한 빛을 내쫓게 될 때 그 나그네의 옷을 벗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정한 능력은 거친 데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강한 데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따뜻함이 있고 온유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거칠고 폭력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따뜻함과 부드러움 가운데서 주어진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온유한 사람의 특징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의 모습에 가지고 있습니까?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처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 성장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타인의 잘못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험담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온화한 사람들의 이런 특징들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도전해 주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온유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에서 온유라고 하는 단어는 프라위스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친절하다 겸손하다는 뜻하고 있습니다. 또 인내 절제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프라위스라고 하는 단어는 어디에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까? 거친 짐승을 길들여서 온순하게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거친 말을 잘 길들이면 어떻게 됩니까? 어린아이들이 그 말 위에 타도 날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강력한 힘을 가지고 어린아이를 잘 싣고 갈 뿐만 아니라 그 힘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온유함이라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온유함은 부드럽고 온화하며 타인에게 친절하고 유순하게 대하는 성품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연약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조화롭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강인한 마음과 행동이 성숙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연약함이 아니라는 거예요. 부족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강한 능력이 있음에도 그 능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절제하는 것이고. 통제하는 것이고. 그 힘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인의 온유함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 통제받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만한 가운데서 절제하고 지배를 받고 통제됐을 때 강력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사용해서 하는 일을 행하셨을까요? 그것은 온유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 온유한 사람들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첫째, 모세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누이였던 미리암과 형인 아론이 비방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인내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미리암은 나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온유함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생애를 세 부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한 살부터 40세까지 그는 바로 왕궁에서 살았던 세월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상당히 거칠었습니다. 그래서 살인을 하게 되고, 왕궁에서 도망을 나오는 신세가 됩니다. 그는 40년을 광야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그래서 80세까지 광야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광야 생활을 통해서 모세의 성품이 다듬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8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했던 것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성품을 다듬으십니다. 그리고 그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성품이 온유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쓰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광야 훈련을 통해서 온유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요셉입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미대 안에 사람들에게 팔리게 됩니다. 그는 애굽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려움을 당하고 시험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받아들였으며, 최선을 다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가나인에 가난의 기근이 들었을 때 초청하여 아버지 야곱을 비롯한 형제들을 애굽의 고센 지역에서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게 됩니다. 그런데 형들은 자신이 한 일이 있으므로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혹시 자신들에게는 악행에 대해서 복수를 하지 않을까? 라고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요셉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창세기 50장 19절과 20절은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형제들이지만 자신을 죽이려 했고, 이방인들에게 팔아버려서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게 만들었던 형들을 용서한 것입니다. 그 형들을 살게 하고 자녀들을 내가 양육하겠다고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온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온유함은 아무 때나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아무 사람에게나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역경과 고난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좀 인내할 수 있어요. 좀 참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다듬으시고 나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요셉처럼 온유한 성품을 가진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출간합니다. 셋째, 스데반입니다. 사도행전 7장 59절과 60절은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잡혔습니다. 그들이 돌로 쳐서 죽음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을 때 했던 고백입니다. 그는 돌에 맞으면서도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을 용서하는 모습은 바로 온유함입니다. 때로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를 억울하게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온유함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넷째, 바울입니다. 빌립보서 1장 18절은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합니다. 이 내용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자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이 일어났습니까? 의도적으로 바울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되자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마 복음의 열매도 많이 맺혔을 것입니다. 그 소식이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기에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울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되든지 어떤 평가를 받는지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진다면 그리스도가 영광을 얻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살았고 복음을 위해서 인내했고 복음을 위해서 절제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온유한 사람이에요. 마음이 온유하지 못하면 사람들과 경쟁을 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때로는 힘들고 그것 때문에 시험을 받고 그것 때문에 낙심하게 된다는 거죠. 그러나 우리가 온유한 자가 되었을 때는 복음의 가치를 알고 그 가치에 우리 자신을 맞추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연합하지 못하고 동역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온유한 마음이 없을 때는 불가능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끼리도 경쟁합니다. 그리고 다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유한 자가 되었을 때는 복음을 위해서 연합하고 협력하고 동역한다는 사실을 여러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첫째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합니다. 예수의 마음은 겸손과 온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닮았느냐? 하는 것을 어디에서 알 수 있습니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겸손과 온유한 마음이 내게 있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본받는 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의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사랑의 속성은 온유함에 있습니다. 사랑의 증거도 온유한 태도와 행동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느냐 내가 사랑했느냐 내가 사랑이 풍성한가를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게 온유한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을 온유하게 하느냐? 행동을 온유하게 하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거칠게 대하게 되고요. 함부로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이 풍성한 자가 되는 것이 바로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5장 22절과 23절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억지로 온유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온유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온유한 자가 되기로 다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능 충만할 때 온유함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열매라는 사실을 여러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온유하냐? 라는 것은 내가 얼마나 성령 충만하냐? 라는 거예요. 성령 충만하지 못한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차가워집니다. 거칠어집니다. 폭력적으로 됩니다. 경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온유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이 부드럽고요. 따뜻하고요. 배려할 줄 알고, 사람이 좀 유연해져요.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인간적인 성품이 아니고 성령의 열매 가운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랑의 태도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령 충만함에 있다는 거예요.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배우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닮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풍성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성령 충만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이 되고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되고, 사랑의 말과 태도를 보이고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온유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는 신앙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1절과 12절은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온유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온유함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온유함을 따르게 될 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온유한 자로 살아갔을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관계입니다. 잠언 15장 1절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갈등과 분노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말이 거친 사람은 다툼을 일으킵니다. 다른 사람을 분노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순한 대답, 유순한 말은 사람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과 갈등하고 분노를 일으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화해하고 조정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성장입니다. 야고보서 1장 21절은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듣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이 있었을 때, 온유한 마음이 있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넷째,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시편 37편 11절은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실까요? 온유한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재물과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지경도 넓어질 뿐 아니라 더 많은 복으로 충만케 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많은 연약함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고 사람들의 실수나 실패를 대해야 하는가? 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6장 1절과 2절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신령한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육신적인 사람은 온유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의 자신을 돌아봅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비난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자신을 성찰한다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자기의 주어진 책임을 감당합니다. 사랑을 실천합니다.
어떤 사람이 영향력 있을까요? 온유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세우고 살리는 일에 쓰임을 받는 사람, 그런 능력을 행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온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사람도, 가정이나 직장이나 공동체를 세우는 사람들은 모두 다 온유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온유는 약함이 아니라 절제된 강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거룩한 삶입니다. 단순한 결심이 아니라 성령 충만의 열매다. 우리는 온유함에 대해서 적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온유한가? 어떻게 하면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온유한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2월에 여러분 온화한 삶이 되어 살기를 결단했으면 합니다. 또한 온유한 말을 하고 온유한 행동을 했을 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간증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성경적으로 온유한 자로서 살아가는 삶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2월을 온유한 사람이 되는 시간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이 나의 성품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온유함이 좀 더 깊어지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