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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음보다 더 심할 수 있습니다(벧후 2:17-22)2024-07-22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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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보다 더 비참할 수 있다

베드로후서 2:17-22

 

결혼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종종 듣게 되는 말은 무엇입니까?

연애할 때는 안 그랬는데, 결혼하더니 변했어.” 혹은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라는 말입니다. 특히 부부싸움을 하면 흔하게 주고받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변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랬던 사람입니다.

 

사실은 결혼하고 변한 것이 아니라 결혼 전에는 못 본 것입니다. 어쩌면 시간이 흐르고, 상황과 환경이 달라지면 변하는 것은 당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변화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반면에 변질하지 않아야 합니다.

 

변화는 결혼생활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시간이 흐를수록 긍정적인 변화와 성장이 일어날 수 있으며, 부정적인 변질과 침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신실하고 온전한 믿음이 있는 사람도 있으며, 그때보다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 거짓 선생과 이단의 영적인 미혹과 유혹으로 인해 온전한 믿음의 길을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베드로후서는 그런 현상을 경고하며 권면하기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그 당시 교회 안에 거짓 선생들과 이단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합니다.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대로 살아갑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유혹하여 실족하게 합니다.

 

그런 자들을 어떤 사람이라고 합니까?

17절은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라고 합니다. 이는 거짓 선생과 이단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물 없는 샘입니다.

샘에 물이 없다는 것을 무엇입니까? 샘으로서의 존재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샘은 항상 물이 솟아나고 흐르고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생과 이단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일시적으로는 영혼의 필요와 만족을 채워주는 것 같지만, 결국 영혼을 노략질하고 망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웃는 얼굴로 찾아오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생명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요한복음 20031절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성경을 기옥한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은 성경을 사사로이 풀어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며 진리를 왜곡하고 변질시킵니다. 그들이 성경을 사용하는 것은 교주를 우상화하며 잘못된 교리를 주장하려는 것뿐입니다. 이단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결국 영원한 사망과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둘째,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입니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2층 목양실로 올라가다 보면 계곡에 안개가 자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침 해가 뜨고 바람이 불면 앞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들었던 안개가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거짓 선생과 그들의 주장을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라고 합니다. 이는 그들에게 생명이 없기에 헛되고 유한하고 무익한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호세아 133절은 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고 합니다. 거짓 선생은 가만히 이단을 끌어드려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무너지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지 않기에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침 안개처럼, 아침 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타작마당에서 바람에 날려가는 쭉정이처럼 될 것입니다.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물 없는 샘와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와 같은 거짓 선생들을 위해 캄캄한 어둠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캄캄한 어둠은 흑암과 공포로 충만한 지옥이나 악한 자들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사로이 풀며 복음의 진리를 변질시키며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은 지옥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천국을 말하지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강조하지만, 재림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거짓 선생과 이단들은 어떻게 유혹과 미혹을 합니까?

18절은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이단이 미혹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두 부류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악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으나, 아직 믿음이 연약한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단이 거짓이라는 알고 빠져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목표는 비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현재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전혀 기독교 신앙적인 배경에 없는 사람이 이단에 빠지는 경우는 흔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허탄한 말과 육체의 정욕은 무엇입니까?

유다서 116절은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고 합니다. 거짓 선생과 이단은 완악한 말을 합니다. 그 말은 원망과 불만과 아첨입니다. 혹시 이단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기성 교회에 대해 원망과 불만을 통해 정죄합니다. 또한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말을 만들어서 합니다.

 

공감심리상담센터 소장이며 이단 상담가인 유연철은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상담하면서 느낀 것을 책으로 발간했습니다. 그는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의 정서와 심리라는 책에서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의 심리적이고 영적인 이유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서적인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다. 성경을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소속감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단은 그것을 이용하여 무익한 말과 육체의 정욕을 자극하는 것을 통해 미혹을 합니다.

 

이단에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19절은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고 합니다. 이단에게 진정한 영적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복음 안에서 주신 영적 자유가 억압을 받고 있습니다. 성경을 왜곡하고 변질시켜 세뇌를 시킵니다. 그래서 잘못된 교리에 중독되게 합니다. 또한 빠져나갈 수 없도록 위협하고 두려워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교주의 종, 사람의 종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이단에 빠진 자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20절과 21절은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라고 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세상의 죄악에서 해방된 사람이, 다시 악한 생활로 되돌아가 세상 죄에 끌려다닌다면, 그 상태는 이전보다도 훨씬 나쁠 것입니다. 차라리 바른길을 모르는 게 더 나았을 것입니다. 바른길을 알면서도 자신들이 받은 거룩한 가르침을 내팽개쳐 버린다면, 오히려 그 길을 알지 못하는 편이 낫습니다.

 

예수님도 무엇을 경고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245절은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고 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가 물 없는 곳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쉴 곳이 필요해서 예전에 살던 집, 곧 귀신이 나간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그곳이 텅텅 비어 있고 깨끗한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악한 다른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들어가서 거기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 사람의 나중 상태가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다시 타락하면 처음보다 더 악해질 수 있습니다. 더 비참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악한 마귀와 그를 따른 거짓 선생과 이단은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들을 찾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시간이 흐를수록 더 거룩하고 온전해야 합니다. 더 거룩하게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이 이단에 빠지는 것은 무엇과 같습니까?

22절은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로 거룩하게 된 자가 이단에 빠지는 것은,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습니다. 돼지가 깨끗이 몸을 씻었다가 다기 더러운 구덩이에 눕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함께 섬기던 사람들에게도,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친구와 이웃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단에 빠진 자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들을 비난하고 정죄해야 할까요? 유다는 이단에 빠진 자들을 구원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건져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자기 자신을 준비해야 합니다.

유다서 120절과 21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에 철저한 자기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거룩한 믿음, 즉 견고한 믿음을 세우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 전쟁하는 영적 군사로 철저한 무장이 필요합니다.

 

둘째, 그 사람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유다서 122절과 23절은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고 합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에 대한 사역의 시작은 긍휼의 마음입니다. 그들이 범한 죄는 미워하지만, 그 사람 존재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의 유혹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긍휼의 마음으로 이단에서 나올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부정적인 변질과 침체를 일으키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가 여전한 신앙생활을 하며, 거룩한 변화와 성장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에 때로는 거짓 선생과 이단을 통해 미혹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상처와 시험을 통해 유혹할 수 있습니다. 그때 처음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실족하며 침체하는 것은 더 비참한 것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신앙의 연조가 늘어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더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