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1:3-4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로 함께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보배로운 믿음은 인간의 행위나 자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즉 보혈로 인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은혜와 평안이 더욱 넘치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앎이 삶이 될 때 풍성한 은혜와 평강를 누릴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과 주신 것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무엇을 행하셨습니까? 3절은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신기한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신기한 능력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령한 능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은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고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이 있을 뿐만아니라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심판하시는 것에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첫째,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해 영적으로 죽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에베소서 2장 4절과 5절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 큰 사랑을 주신 하나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은혜는 사망을 생명으로, 심판을 용서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이 영원한 사망과 저주와 형벌을 받아야 할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으며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둘째, 경건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해 불경건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어떻게 행했습니까? 이사야 9장 17절은 ‘이 백성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하며 모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의 장정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고 합니다. 불경건한 사람들은 악을 했습니다. 그들은 망령된 말을 하고, 고아와 과부를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비웃고 모독하는 말을 합니다. 또한 연약한 자들을 사랑하지 않고 업신여깁니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경건한 자가 되었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건한 삶은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을 얻는 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에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신기한 능력으로 주신 것은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3절b은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셨으며 구원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독생자의 영광이며 충만한 은혜와 진리가 있었습니다. 또한 덕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으로 긍휼과 사랑을 말합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 하나님을 앎으로 생명을 얻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앎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앎이 삶이 될 때 생명의 능력을 경험하고 경건한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며,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은 능력입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을 주신 거룩한 은혜에 감사하며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은 무엇을 주셨습니까? 4절은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보배로운 믿음을 주신 하나님은 또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습니다. 보배로운 믿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것처럼, 보배로운 약속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습니다. 그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 40절은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음을 선언합니다. 그 약속은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예루살렘 거리에서 여러 말로 확증하고 권면하여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을 들은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으며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복음을 전한 베드로와 그가 전하는 복음의 약속을 듣고 믿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이루어진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언약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히브리서 13장 21절은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갖 선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 안에서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그 약속의 성취가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크게 죄책(罪責)의 면제와 죄성(罪性)의 극복입니다. 아담의 원죄로 인해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신분과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는 자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구원, 즉 칭의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죄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죄를 짓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그 죄성을 극복하며 구원을 이루는 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는 단번에 이루어지기보다는 시간이 필요하고 점진적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절실하게 경험한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실수와 실패, 고백과 부인, 칭찬과 책망, 교만과 겸손을 반복하며 영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복음과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베드로는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무엇이라고 합니까? 4절b은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보배로운 믿음과 보배로운 약속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는 자는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신성한 성품, 즉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본질이 같아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닮아 거룩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정욕 가운데 썩어져 가는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을 세상에서 행인과 나그네와 같은 존재라고 하면서, 영혼을 대적하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억누르고 다스릴 것을 권면했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고 육체의 소욕에 이끌려 육체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갈라디아 5장 19절에서 21절은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합니다. 바울은 육체의 정욕으로 인한 육체의 일을 구체적으로 15가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적인 죄로 음행과 더러움과 호색입니다. 둘째, 불신앙의 죄로 우상 숭배와 주술과 이단입니다. 셋째, 관계의 죄로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당 짓는 것과 분열입니다. 넷째, 내면의 죄로 시기와 분냄과 투기입니다. 다섯째, 쾌락의 죄로 술 취함과 방탕함입니다. 이는 세상에서 육체의 정욕을 피해야 온전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을 백성으로 합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로 살고 있습니까? 보배로운 약속을 받은 자로 살고 있습니다. 보배로운 믿음과 약속을 받은 자는 구원을 받은 자로 생명의 능력을 나타내며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경건한 자로 하나님과 사람과 지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갑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앎이 삶이 될 때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와 인생이 가치 있고 존귀한 것은 무엇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보배로운 믿음과 약속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항상 잊지 않고 기억하며 보배로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배로운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