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주일예배

제목더 나은 부활을 사모하라(히 11:32-38)2024-03-31 18:49
작성자


더 나은 부활을 사모하라

히브리서 11:32-38

 

극락은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불교에서 극락은 아미타불이 사는 정토로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이며 인간 세계에서 서쪽으로 10만 억 불토(佛土)를 지난 곳에 있다고 합니다. 그 극락은 지옥과 반대되는 단어이며 개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극락이 나옵니다. 시편 434절의 개역 성경은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극락의 하나님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극락은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의미와 다른 것으로 극락(極樂), 즉 지극히 큰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 개정은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지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부활(復活) 입니다. 부활이라는 대중가요 그룹도 있으며, 7인의 부활이라는 드라마도 방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부활은 성경에서 의미하는 부활과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쇠퇴한 것이나 없어진 것이 다시 성하게 일어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경에서의 부활은 실제로 예수님에게 일어났으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날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부활은 성경과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오늘은 부활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우리의 부활을 믿고 사모하며 부활절 예배를 드렸으면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의 장이라고 합니다. 이는 믿음에 대한 정의와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약성경에서 발견하는 믿음의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벨과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모세와 라합입니다. 그 사람들이 믿음으로 어떻게 살았는지? 믿음으로 살았을 때 받았던 복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어서 믿음의 사람들의 이름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32절은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은 기드온과 삼손과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선지자들이었습니다. 들은 세 부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사로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입니다. 둘째, 왕으로 다윗입니다. 셋째, 선지자로 사무엘을 비롯한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믿음으로 이스라엘과 백성들을 위해 거룩한 사역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믿음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뿐만 아니라, 복음과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33절과 34절은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라고 합니다. 그들은 나라들을 정복했습니다. 의를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았습니다. 사자의 입을 막았습니다. 큰불의 세력을 막아 내었습니다. 칼날을 피했습니다. 약한 데서 강해졌습니다. 전쟁에서는 용감하여 승리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군사적인 전쟁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최악의 상황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들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극복했습니다. 성도들에게 있어 진정한 문제는 환경이나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고린도후서 129절과 10절은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약함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함을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약한 데서 그의 능력이 온전해졌으며, 약할 때 강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의지하게 합니다. 연약함 중에 온전함과 강함을 경험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에게 환경과 상황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연약함 속에서 강한 능력과 온전함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까?

35절에서 38절은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고 합니다.

 

그들이 받았던 핍박과 고난은 무엇이었습니까?

심한 고문입니다. 조롱과 채찍질입니다.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입니다. 돌로 맞고 톱으로 켬입니다. 짐승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니는 궁핍입니다. 환난과 박해입니다.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서 산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인간적인 수치와 모멸과 고통을 당했습니다.

 

히브리서는 A.D 60년대 후반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10개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중에 히브리서에 언급된 박해는 A.D 64년에 로마의 네로에 의해 행해진 박해로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황제 숭배를 거부했습니다. 네로는 로마에 일어난 대화재를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것으로 주장하며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짐승의 가죽을 입혀 굶주린 사자에게 던져 먹히게 했으며, 끓는 기름 가마에 넣기도 했습니다. 네로 박해로 인해 순교한 사람은 베드로와 바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35절은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고 합니다. 그 당시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죽은 자에게 있는 더 좋은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활 신앙이 있었기에 신앙을 위해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에서 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더 나은 부활을 사모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다 나은 부활을 사모할 때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이 충만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