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마지막 한 달(2) : 열정 데살로니가전서 2:17-20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며 경건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내 생애 마지막 한 달’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서론적인 것으로 ‘인생은 일생이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죽음을 알고 계셨지만 어떻게 사셨습니까? 오히려 죽음을 앞에 두셨기에 어떻게 사셨습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이루셨습니다. 자신을 배반하고 부인하고 떠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복음 전파의 사명을 제자들에게 위탁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과 목적을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잃어버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오늘은 내 생애 마지막 한 달에서 ‘열정’에 관해 나누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열정과 비슷한 의미가 있는 것은 열심입니다. 열정(Passion)은 ‘강한 감정이며, 특정 활동이나 목표에 대한 강한 관심과 흥미’를 의미합니다. 열심(Diligence)은 ‘노력하고 꾸준히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열심은 노력과 인내를 요구하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열정은 마음의 불꽃이며, 열심은 그 불꽃을 지속적으로 태우는 힘입니다. 오늘은 열정과 열심을 구체적으로 구분하기보다는 같은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한 달을 후회 없이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은 열정입니다. 예수님은 열정을 가지고 사셨으며, 바울을 비롯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열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또한 인생의 성공을 경험한 사람들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성공이란 열정을 잃지 않고 실패를 거듭할 수 있는 능력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은 열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7절은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고 합니다. 바울은 악한 자들의 박해로 인해 잠시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나 베뢰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얼굴을 떠난 것이지만 마음 까지,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에 한두 번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려고 했으나 사단이 막아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바울의 열정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열정은 직접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할 수 없게 되자, 편지를 써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열정은 공간적 거리가 있지만 심리적 거리를 느끼지 않게 합니다. 열정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핑계를 찾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 있습니까? 혹시 핑계를 찾고 있습니까? 방법을 찾고 있습니까? 핑계가 아니라 방법을 찾는 열정이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열정으로 인해 오히려 부정적인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었던 열정은 무엇입니까? 첫째, 악한 일을 위한 열정입니다. 빌립보서 3장 6절은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고 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율법에 비추어 보아도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열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유대교에 대한 열정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악한 일로 나타났습니다. 바울만 아니라 악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갈라디아 4장 17절은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열심히 가르치며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바울과 갈라디아 성도들을 이간질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왜곡하고 변질시켜 온전히 믿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열정을 가지고 교회와 사람들을 섬기며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열정은 무엇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이간질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직장 생활이나 학교생활을 하는 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을 세우는 일에 열심을 내고, 동료를 하나 되게 하는 일에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친구들을 사랑하며 섬기는 일에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열정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게 하는 줄 믿습니다. 둘째, 선한 일을 위한 열정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은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악한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선한 일에 열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완벽하거나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어리석고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해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들을 순결한 신부로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거룩한 신부로 살도록 열정을 갖고 헌신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바울에 있었던 선한 일을 위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도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 살아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아가 그들이 거룩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 수 있도록 사랑하며 섬기며 돌보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삶의 열정, 복음을 전하는 열정, 사랑하며 섬기는 열정이 더 뜨거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열정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그 열정은 무엇에 있었습니까? 디도서 2장 14절은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주셔 우리를 구속하시고 깨끗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일에 열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친 백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한 열정을 통해 구원을 받고 성결함을 입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처럼 선한 열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고 희생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거룩한 열정은 복종과 희생과 헌신으로 나타나야 하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요한계시록에는 예수님이 편지를 보낸 일곱교회가 있습니다. 그중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은 없고 책망만 받은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받은 책망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3장 15절과 16절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교회 성도들의 신앙 상태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차지도 덥지도 않았습니다. 항상 미지근한 물과 같은 영적 상태였기에 마시지 못하고 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 요한계시록 3장 19절은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에 책망하며 징계하시며 열심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열정이 없는 교회는 칭찬은 없고 책망을 받습니다. 열심히 없는 성도들은 책망과 징계를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열정을 잃고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착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이며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우리를 향해 열심을 내라고 하십니다. 열정이 없는 것은 죄이며 책망과 징계를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교회 생활은 어떻습니까? 직장 생활은 어떻습니까? 학교생활은 어떻습니까? 혹시 라오디게아 교회와 성도들처럼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는 아닙니다. 마지못해서 하고, 어찌하지 못해서 하고, 할 수 없어서 하고, 억지로 하고, 죽지 못해서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열정을 품고 열심히 생활해야 합니다. 그런데 열정이 충만하기도 하지만, 싸늘하게 식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열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열정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첫째, 사명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섬김의 절정은 자신의 목숨을 주어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으며,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사명에 집중하면 열정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열정은 우리를 사명에 집중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둘째, 인내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때로는 멸시와 천대를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포기하지 않으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인내는 어떤 상황에서도 열정을 잃어버리지 않게 합니다. 또한 열정은 어떤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게 합니다. 그 열정으로 많은 장애물을 극복하고 돌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동역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2절은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선한 일을 위한 고린도 교회의 열심은 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도전을 주었습니다. 그들에게 더 분발하며 선을 행하는 열심을 품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열정은 전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열정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함께 동역하는 자로 뜨거운 열정을 갖고 후회하지 않는 신앙과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넷째, 성령 충만입니다. 사도행전 4장 31절은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겁쟁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잡히시자 배반하고 부인하고 도망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자 어떻게 되었습니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은 그들의 영혼을 뜨겁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사명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성령 충만을 받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열정을 잃지 않았으며 합니다. 열정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후회하지 않은 인생을 사는 것은 무엇에 있습니까? 어떤 상황이냐? 환경이냐? 능력이냐? 소유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정이 있느냐? 열정이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 차가운 가슴, 냉담과 냉소적인 태도로 인생과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 식지 않는 열정이 있기를 원합니다. 뜨거운 열정이 회복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처럼 거룩한 열정을 품고 살았으면 합니다. 그 열정으로 어떤 장애물도 극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한 열정을 품고 행복하고 거룩한 영향력이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