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를 사랑하라 마가복음 10:13-16 D6 DNA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세대간 신앙 계승을 위한 나침판’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책으로 ‘세대 통합 가족 사역, 가정과 교회가 함께하는 세대 간 제자훈련’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책을 저에게 소개한 분은 신학대학원 동기이며 D6 코리아 대표인 김치남목사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었던 2021년에는 인터넷으로 세미나에 참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세대 통합에 대한 필요성과 중요성을 느끼고 장로님들과 주일학교 교사들을 비롯하여 성도들과 비전을 나누고 우리 교회도 세대 통합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제주노회에 세대 통합 예배를 드리는 몇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 오전 예배는 장년을 중심으로 하는 세대 통합 예배를, 오후에는 다음 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세대 통합 예배와 성경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세대 통합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와 가정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세대 통합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함께 참여해 주시는 모든 성도들의 귀한 헌신에 감사합니다. D6 DNA를 읽으려고 책장을 넘기면서 풍경이 있는 교회의 정용성목사님의 추천사에 눈이 머물렀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가족이다. 교회 교육은 사육이 아니라 양육이다. 진정한 의미의 양육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뜻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일상생활이 말과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 성경적 양육은 세대 간 통합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함께 성경 말씀을 읽고 소통해야 한다. 삶의 언어를 통해 부모의 신앙이 자녀에게 이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세대 간의 단절이 생기고 이전 세대가 경험한 은혜와 하나님의 역사를 다음 세대가 알지 못하게 된다.” 그 추천서를 읽으면서 많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안타까움과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이 안타까움과 후회는 어쩌면 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녀의 신앙에 대해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우리가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자녀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시며,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자녀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다음 세대가 다른 세대가 되지 않도록 우리도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고 함께 기도하며 격려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개혁파교회의 교회력은 대림절, 성탄절, 종려주일, 부활주일, 성령강림절, 맥추감사주일,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그런데 어린이주일이나 어버이주일을 지키는 것은 교육과 효도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즈음은 교육주일과 가정주일로 지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독문 95번은 가정주일이, 112번은 교회교육주일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은 교회교육주일, 즉 어린이 주일과 스승의 주일로 지킵니다. 교회교육과 어린이에 대해 함께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특히 본문에 나타난 어린아이에 대한 태도와 교육에 대해 주목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 어린아이를 데려온 목적은 무엇입니까? 13절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만져 주시길 기대했습니다. 이에 어린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어린아이는 ‘παιδιον’(파이디온) 으로 ‘갓난 아이, 즉 6세 이하의 아이’를 말합니다. 또한 ‘만져 주심’이라는 것은 ‘ἄπτομαι’(하프토마이) 로 ‘안아주심, 축복하심’의 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안고 축복해 주실 것을 기대하며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를 데려온 사람들의 기대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반응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첫째,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13절은 ‘제자들이 꾸짖거늘’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린아이를 어루만져 주시기를 기대하며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여기에서 ‘꾸짖는다’는 것은 단순히 책망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매우 강한 비난과 책망으로 그들의 행위를 저지시키고 좌절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이 책망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질책에 사용된 것입니다. 스가랴 3장 2절은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마귀를 책망하시는 것처럼, 제자들이 어린아이를 데려온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태도는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정죄한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은 매우 중요한 일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중이셨습니다. 그것은 고난을 받고 죽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매우 두려움을 갖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런 시기에 어린아이로 인해 예수님께서 시간을 보내시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효율적이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에 어린아이를 막는 것이 예수님을 위해서도, 효율적인 사역을 위해서도 옳은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어린아이는 중요하게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으며, 관심에서 멀리 있던 존재들이었습니다. 어린아이를 데려온 사람들을 꾸짖은 것은 어린아이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 교회가 범하고 있는 오류는 아닙니까? 주일학교 학생들을 향한 거룩한 돌아봄과 나아감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교사들을 위한 격려가 있었으면 합니다. 물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더 많은 성도들이 더 많은 관심이 있었으면 합니다. 교회교육과 어린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이 되고, 우리의 관심이 예수님의 관심이 되고,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과 다른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그것에서 우리는 어린아이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사랑은 용납입니다. 14절은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린아이를 데려온 사람들을 책망하는 것을 들으시고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습관적으로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언제 예수님께서 분노하셨습니까?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사람들을 향해, 어린아이를 막은 제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노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에 대한 잘못된 태도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잘못된 마음과 태도가 예수님을 화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입니까? 우리가 어린아이를 용납하지 않을 때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을 때입니다. 용납은 ἀφίημι(아피에미)로 ‘버려두다, 용서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입장, 형편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지나친 간섭이 아닙니다. 사랑은 억압적인 통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용납은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나 연약함을 긍휼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것을 용납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용납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하시고 책망하신 것이 있습니다. 에스겔 20장 31절은 ‘너희가 또 너희 아들을 화제로 삼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오늘까지 너희 자신을 우상들로 말미암아 더럽히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겠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 아들을 제물로 드리며 영혼을 더럽히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용납하는 데 있어 악함과 연약함을, 실수와 고의를 구분해야 합니다. 바울은 용납에 대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고린도후서 11장 1절은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은 것을 용납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완벽하거나 완전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연약하여 실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작은 실수와 잘못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다른 예수를 가르치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용납했습니다. 누가 용납할 수 있습니까?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14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라고 합니다. 때로는 불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면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용납하고 용서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거룩한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는 자가 용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용납하셨습니다. 그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용납하셨습니다. 우리도 어린아이들과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용납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들을 비난하고 책망하고 정죄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실수를 용납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랑은 축복입니다. 16절은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를 잘 살펴야 합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을 품에 안으셨습니다.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얻으셨습니다.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의 기대보다 더 놀라운 것을 행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축복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복을 받고 축복의 통로로 살았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로 형통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있던 보디발의 집이나 감옥이나 애굽에 풍성한 축복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과 바울은 축복에 대해 무엇을 권면하셨습니까? 누가복음 6장 28절은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로마서 12장 14절은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박해하는 자를 위해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저주하고 모욕하고 핍박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축복하는 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의 거룩한 사명입니다. 예수님처럼 어린아이를 안고 안수하며 축복했으면 합니다. 때로는 연약하고 부족하여 실수하고 넘어지는 사람들을 품에 안아 주었으면 합니다. 그들을 비난하고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하고 기도했으면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그런 사랑을 하고, 그런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세대에 대한 교육에 더 많은 관심과 헌신이 있었으면 합니다. 학생들과 교사들을 위해 기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위한 꿈을 꾸고 키울 수 있게 격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교회는 용납하고 축복하는 공동체입니다. 교육은 용납과 축복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들이 용납받고 축복받을 수 있는 교회를 함께 세웠으면 합니다. 사랑은 용납입니다. 사랑은 축복입니다. 예수님처럼 어린아이를 사랑하는 성도들과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