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가 희망입니다 요한복음 10:6-12 예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며 저술가요 정치가이며 웅변가였습니다. 특히 웅변 실력이 탁월하여 청중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는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As long as there is life, there is hope) 고 했습니다. 이는 지금 살아 있는 것이 희망이며,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살 수 있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 있다는 것이 절망이며, 절망적이기에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인생에 희망을 주는 예수님에 대해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로 노예로 살던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거칠고 메마른 광야를 지나 하나님이 언약하신 젖과 땅이 흐르는 곳에서 정착하여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를 비롯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죽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사사 시대에는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죄를 지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 이방 나라들과 같이 인간 왕을 원했으며 하나님은 그로 인해 일어난 비극과 불행에 대해 경고하시면서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베냐민 지파 사울이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영적인 암흑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의 왕국으로 세우려는 욕심을 갖고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말씀을 버렸기에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유다 지파 이새의 아들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삼하 21:17). 그는 사울 왕 시대에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은 이스라엘을 밝히는 등불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라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다윗은 사울 왕 시대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완벽하지도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실망하게 만들며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에도 다윗이 죄를 범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헷 사람이며 충실한 신하였던 우리아가 전쟁에 나갔을 때 그의 아내 밧세바를 불러 간음의 죄를 범했습니다. 그로 인해 밧세바가 임신하자 은폐하기 위해 요압을 시켜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게 만든 것입니다. 또한 다윗의 통치 말기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구조사를 하고, 그 결과 전염병으로 칠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이 간음의 죄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살인을 시켰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떠했을까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은 인구조사를 통해 백성들이 죽었을 때 어떠했을까요? 그것을 알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에 대해 실망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절망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과 이스라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함과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실망시키며 절망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실망하고 절망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희망을 잃어버리고 절망하며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절망 가운데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누구입니까? 사도행전 13장 23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고 합니다. 다윗이 죄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망을 주었지만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한 분을 구세주로 삼아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비록 사람들은 낙심과 절망을 주는 존재이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뀐 사람은 누구입니까? 수로보니게 족속의 헬라인이었던 한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즉시 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인은 자기 딸에게 들린 더러운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말을 들으시고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마가복음 7장 27절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고 합니다. 그 말씀은 여인의 간구를 들어 주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딸에게 있는 귀신을 내쫓아 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여인이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마 그 말씀을 듣고 낙심하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어떻게 합니까? 마가복음 7장 28절은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고 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거절을 들었음에도 개들도 주인의 아이들이 먹는 상에서 덜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합니다. 그 부스러기와 같은 은총이라도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 외에는 딸에게 있는 귀신을 내어쫓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딸을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에게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마가복음 7장 30절은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말을 들으시고 집으로 귀신이 딸에게서 떠났으니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며 집으로 돌아갔을 때 딸에게서 귀신이 났으며 침상에 평안히 누워있었습니다. 사실 딸이 귀신이 들어 소리를 지르고 발작으로 하는 것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을 찢어지는 것같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오기 전에 이미 많은 방법을 시도했으며, 큰 능력이 있는 많은 사람들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귀신에 시달리는 딸을 바라보며 낙심하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런 여인에게 희망의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입니다. 그 소문은 낙심과 절망 가운데 있는 여인에게 희망의 소식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의 소문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그 소문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오면 낙심과 절망은 용기와 희망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낙심과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절대 희망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강도와 목자의 비유를 무엇을 교훈하십니까? 양이 도둑이나 강도를 만나는 것은 절망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양을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선한 목자가 있는 것은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전하게 보호하며 풍성한 꼴을 먹을 수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의 비유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9절과 10절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고 합니다. 양은 문을 통해 들어가며 구원을 받고 들어가고 나가며 꼴을 먹습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며 더 풍성히 얻게 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양의 문이시며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구원을 받으며 꼴을 먹을 수 있습니다. 생명을 얻으며 더 풍성히 얻을 수 있습니다. 구원과 생명이, 꼴과 더 풍성함은 같은 의미입니다. 꼴은 양의 생존과 성장을 위한 양식입니다. 더 풍성함은 생명을 더한 삶의 행복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무엇에 있습니까? 사망과 불행에 있습니다. 반면에 인간의 희망은 무엇에 있습니까? 생명과 행복입니다. 예수님에게 생명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신명기 33장 29절은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면서 이스라엘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며 승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안전과 성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없었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광야의 생활이 불행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광야 생활을 하며 때로는 원망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있었기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희망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희망은 무엇에 있습니까? 예레미야 29장 11절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고 합니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원망하게 됩니다. 우리 주변의 상황이나 환경을 생각하면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며, 미래에 희망을 주는 것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믿고 나와 만난 사람들은 희망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혈루증으로 고통을 받던 여인의 혈루 근원이 마르고 구원과 평안을 얻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한 여인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에서 놓임을 받고 믿음을 인정을 받았습니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났지만 무덤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그 외에도 각 색 병든 자들은 치유를 받았으며 귀신의 억압에서 해방되었으며 마음에 근심과 염려가 있던 자들은 평안과 안식을 얻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업의 실패로, 구직의 실패로, 입시의 실패로, 육체의 질병으로, 인간관계의 실패로, 가정의 위기, 영적인 위기 가운데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생각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오면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품었으면 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없을지라도 예수님이 있으면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으로 인해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