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합니다 하박국 3:17-19 예화) 감사의 고수가 되자 아름다운 동행 감사학교 교장인 이의용 장로는 감사에도 하수와 중수와 고수가 있다고 합니다. 하수는 기적이 일어날 때만 감사합니다. 중수는 일상에서 좋은 일들을 일어날 때만 감사합니다. 고수는 불만스러워할 일이 있어도 긍정적으로 해석하며 감사합니다. 감사의 고수가 되려면 6개의 장벽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지난 일 후회하지 않기, 고마운 일 망각하지 않기, 미래의 일 염려하지 않기, 비교하지 않기, 채무의식에서 벗어나기, 부정적 의식에서 벗어나기’ 입니다. 감사의 하수와 중수가 아니라 고수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며 성찬식이 있는 주일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와 축복하심을 생각하고 감사했으면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생각하며 거룩한 성찬식에 참여하고 구원의 은혜에 감사했으면 합니다. 하박국서는 불의가 득세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역사하심으로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또한 죄인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만 믿음으로 사는 의인은 구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박국서의 핵심 요절은 하박국 2장 4절의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입니다. 그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1절은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고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은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고 합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은 믿음이며,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며, 구원을 받은 자는 믿음으로 산다는 신앙의 진리와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박국이 어떤 사람인지 성경에서 침묵하고 있기에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이라는 뜻은 ‘안다, 포옹하다’ 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4장 16절에서 ‘엘리사가 이르되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하니 여인이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고 합니다. 엘리사사 수넴 여인을 향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고 했는데, 학자들 중에는 엘리사를 대접한 수넴 여인이 낳은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박국서는 하박국의 질문과 하나님의 답변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박국서의 내용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찬 세상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부흥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보는 염려로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염려는 예배로 변합니다. 두려움은 신앙으로 바뀝니다. 공포는 신뢰로 변합니다. 자포자기는 희망으로 치료됩니다. 번민은 찬양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서는 물음표(?)로 시작하여 느낌표(!)로 마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말씀은 하박국서의 느낌표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하박국은 이스라엘에 임한 환난과 절망을 희망으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 하박국이 활동하던 시대와 매우 비슷합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에서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감사와 기쁨에 관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절망과 슬픔이 감사와 기쁨으로 변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박국은 현재의 상황에 대해 무엇이라고 합니까? 17절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는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었습니다. 포도나무는 있으나 포도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올리브 나무에서는 소출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밭에는 거둘 곡식이 없었으며, 우리에는 양이 없고, 외양간에는 소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당시에 농경과 목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무의 열매를 먹고 양과 소에게서 나는 젖을 먹어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농경을 하는 사람들은 먹을 곡식을 얻지 못하고, 목축을 하는 자들에게 가축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살아갈 힘도 없었으며, 희망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모습입니다. 공장은 있으나 일이 없습니다. 제품을 생산해도 돈이 되지 않습니다. 제품을 팔아야 하지만 팔 곳이 없습니다. 아무리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들게 수고를 하지만 손에 들어오는 수익은 없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통장의 잔고는 바닥을 보이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장년들은 일자리에서 밀려나고 있습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만 있다면 좋을 텐데 이제는 그것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면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감사도, 즐거움도 기쁨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하박국 선지자는 새로는 희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즐거움과 기쁨을 얻었다고 선포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박국이 무엇을 보았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박국은 모든 것이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18절은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엇이 있느냐? 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있으면 즐겁고 기쁘지만, 만약 그것이 없으면 슬픔과 절망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얻었지만 상처뿐인 영광입니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어떻게 즐거움과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박국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감사와 기쁨을 고백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은 진정한 즐거움과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밭에서 나는 소출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가축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에 감사와 기쁨의 근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에게 있는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감사하며 즐거움과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무엇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에게 없는 것을 바라보며 슬퍼하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이 없을 수 있습니다. 아니 실제로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정말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를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를 절망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하고, 그 무엇이 없다하더라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박국을 즐겁고 기쁘게 했던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셨습니까? 19절은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박국의 힘이 되시는 분이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가 믿고 의지했으므로 환경을 초월하는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생존권이 박탈될 정도의 현실적인 위기에 빠졌을 때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감사와 기쁨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에게 힘주시고 소망 되시는 하나님께 있는 줄 믿습니다. 감사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1차원은 ‘만약 무엇이라면 감사’입니다. 2차원은 ‘무엇 때문에 감사’입니다. 3차원은 ‘그럼에도 감사’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는 3차원의 감사였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박국 선지자처럼 우리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인해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발견했으면 합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없을지라도 진정한 감사와 기쁨을 고백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