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이 되라 디모데후서 2:14-19 예화) 윤동주의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윤동주 시인의 서시입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암담한 시절 부끄러움 없는 삶을 위한 신앙심고 애국심을 가진 시인의 괴로움과 고뇌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갈망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때 종종 얌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얌체는 본래 염치에서 변형된 말로, 얌치에서 얌체가 되었습니다. 염치(廉恥)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으로 긍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얌체는 ‘거리낌 없이 자기 이익만 따져서 행동하는 사람이나 그런 일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 으로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얌체가 아니라 염치를 가진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부끄럽게 사는 것은 염치가 없는 얌체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얌체가 아니라 염치가 있는 그리스도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부끄럽지 않은 일꾼이 되라’ 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일꾼, 교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일꾼이 아니라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부끄럽지 않은 일꾼이 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부끄럽지 않은 일꾼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4절은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고 합니다. 바울은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라고 합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2장 3절에서 6절까지 언급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며,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영적인 병사요 경기자요 농부로서의 그리스도인입니다. 또한 이 일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전하고 가르친 복음을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정체성을 잊지 않고 복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기억할 때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으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서로 말다툼을 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지만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에 말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말다툼은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유익하지 않은 것을 갖고 논쟁하거나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부끄럽지 않은 일꾼은 말다툼을 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말다툼을 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복음과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와 허물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알고, 그 십자가의 희생적인 사랑을 안다면 결코 말다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로 말다툼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서로를 존중하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둘째, 교회와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말다툼을 하는 것은 유익이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듣는 사람들을 망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상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서로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상처가 되는 논쟁이나 다툼을 하고 있습니까? 어린애들을 싸움을 보며 정말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모습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피를 토하고 입에 침을 튀겨가며 주장하고 논쟁하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실까? 를 생각했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보다 더 여유롭고 배려있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일꾼은 말다툼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성도들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자가 됩니다. 교회를 망하게 하는 자가 아니라 흥하게 합니다. 부끄럽지 않은 일꾼이 되어 무익한 자가 아니라 유익한 자로, 망하게 하는 성도가 아니라 살리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바울은 어떻게 부끄럽지 않은 일꾼이 될 수 있다고 합니까? 우리가 부끄럽지 않은 일꾼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5절은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이는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헌신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힘써야 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헌신은 하나님 앞에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지 않고는 거룩한 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까? 먼저는 우리 자신에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신앙 양심을 비추어 보아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다음은 다른 사람과 성도들이 보기에 부끄럽거나 창피한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덕을 세우지 못하는 말과 행동을 하면 성도들과 교회를 멀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말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진리의 말씀은 복음과 성경 말씀을 말합니다. 그 당시에 에베소교회에는 복음과 성경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주의와 율법주의와 영지주의였습니다. 지금도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지 않고 복음을 변질시키는 교회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이비와 이단들이 있습니다. 갈라디아 4장 17절은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고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성도들을 위해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바울과 성도들을 이간시켜 자신들을 따르게 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수고를 하고 열심을 내었지만 더 부끄러운 일꾼으로 열심을 내고 수고했을 뿐입니다. 우리도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열심과 무엇을 위한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특히 영적 분별력을 갖고 말씀을 깨닫고 순종해야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말과 행실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을 받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온전한 헌신을 하는 부끄럽지 않은 일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부끄러운 일꾼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일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16절과 17절은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고 합니다. 에베소교회에 악성 종양과 같은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경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악성 종양과 같이 퍼져나가 물들게 했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운 일꾼으로 악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선한 영향력, 거룩한 영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그들의 망령되고 헛된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18절은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고 합니다. 그들은 진리에서 멀리 떠나버렸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이미 지나갔다고 말함으로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육체의 부활만 아니라 성도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말로 미혹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부정하게 함으로 믿음을 파선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은 연약한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지게 만드는 자가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세우는 자입니다. 우리도 다른 성도들의 믿음을 허무는 자가 아니라 온전하게 세우는 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부끄러운 일꾼을 보며 어떻게 할 것을 권면합니까? 그들을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과 결단을 해야 합니까? 19절은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고 합니다. 악성 종양과 같은 후매네오와 빌레도에 의해 에베소 교회에 연약한 성도들의 믿음이 무너뜨리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서 있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하지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불의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들은 불의한 일에 참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불의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아야 하며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거룩성을 상실한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성도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일꾼으로 헌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자부심을 갖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교회의 일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헌신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부끄럽지 않은 일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 자랑스런 일꾼이 더 많아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