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함으로 기도하세요 빌립보서 4:4-7 예화)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고 드린 감사기도 지난 10월 16일에 미국 토렌스조은교회에서 이범집사의 천국환송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 LA에서 변호사로 일을 하면서 신실한 믿음을 갖고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암 투병을 하다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이범집사는 지구촌교회에서 은퇴한 이동원목사의 차남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보내고 ‘아들 범과 작별하며 드리는 감사’ 가 잔잔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동원 목사님이 드린 10가지 감사는 이런 내용입니다. 1) 아들이 그 지독한 암의 통증에서 해방되어 감사합니다. 2) 영광의 나라 천국에 입성하여 감사합니다. 3) 그동안 유머가 많았던 아들을 인해 누린 기쁨을 인해 감사합니다. 4) 단 한 번도 불평 없이 자랑만 하던 아내와 애교덩어리 손자를 남겨주어 감사합니다. 5) 어려서 게임을 좋아하더니 게임변호사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6) 아들의 고통을 통해 예수님을 내어주신 하늘 아버지의 고통을 알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7) 아들의 암 투병을 통해 수많은 암 환자의 고통과 연대하게 된 것 감사합니다. 8) 또한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수많은 부모들의 고통과 연대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9) 아들의 치유를 위해 기도한 수많은 중보 기도자들과 한 지체가 되어 감사합니다. 10) 아들이 간 천국을 더 가까이 소망하게 되어 감사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먼저 보내는 것은 부모에게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며 슬픔입니다. 그것은 목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동원 목사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작별하며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모든 일에 감사하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하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일어난 환경과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하며, 낙심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면서 잃어버렸던 감사, 잊고 있었던 감사의 기도를 회복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본문은 바울이 빌립보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권면입니다. 그는 무엇을 권면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기뻐하라, 용서하라,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쁨과 관용과 염려는 기도와 간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사의 기도와 기쁨과 관용과 염려는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하는 기도와 관련하여 말씀의 은혜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바울의 권면은 무엇입니까? 첫째, 기쁨입니다. 4절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고 합니다. 이 말씀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는 모든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기뻐할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쁨의 근원을 소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공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정받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얻고 이루고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얻고 이루고 누린다고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추구하지만 진정한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적인 기쁨은 순간이요 온전한 기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바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는 ‘주안에서’ 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기쁨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소유하지 못했어도, 많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어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해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안에 있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세상의 소유나 성공이 주지 못하는 거룩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안에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6장 24절은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기쁨이 충만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받을 수 있으며 기쁨이 충만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면 낙심이 용기로, 절망이 소망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관용입니다. 8절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고 합니다. 바울은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합니다. 관용은 ἐπιεικής(에피에이케스) 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입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죄를 용서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사랑과 용서 받은 자로 또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용서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용서 받은 자로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용서하다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관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에 있습니까? 마태복음 5장 44절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원수입니까? 박해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자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인간적인 생각이나 감정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신앙을 표현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관용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다음에 용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8절은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고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갈 날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재진 시인은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라는 시에서 “....미워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외롭지 않고 지치지 않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까닭 없이 자꾸자꾸 눈물만 흐르는 밤 길에 서서 하염없이 하늘만 쳐다보네 걸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따뜻한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라고 합니다. 아직 사랑할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아직 사랑할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사랑하며 용서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혹시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을 원망하고 미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로 인해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로 다듬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위해 감사함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그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주님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용서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셋째, 염려입니다. 6절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고 합니다.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간은 세상의 일에 대하여 염려하는 존재입니다. 요즈음은 건강 염려증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건강에 대한 염려가 있으며, 오랜 기간 동안 경제의 침체로 인해 물질에 대한 근심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자녀에 대한 염려, 직장과 사업, 노후의 삶에 대한 것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염려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찾기가 점점 힘들어 집니다. 작은 갈등에도 과민하게 반응하고, 화를 내고, 극단적인 행동을 합니다. 때로는 자기 파괴의 우울에 빠지기도 합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유혹으로 인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염려하지 말고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라’ 고 합니다. 바울은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렇습니다. 염려하고 근심할 시간이 있으면 기도하는데 보내야 합니다. 염려할 힘이 있으면 기도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하는 마음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고 합니다. 모든 염려와 걱정을 주님께 맡기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으면 염려가 썰물처럼 사라집니다. 밀물처럼 평안이 밀려옵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7절은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지각은 헬라어 νοῦς(누스) 로 ‘이해력, 통찰력’ 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모든 것을 이해하시고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은 하나님의 평강을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할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둘 믿습니다. 예화) 감사의 기도 1918년, 미국 미네소타 주 보베이(Bovey)라는 작은 탄광촌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에릭 엔스트롬 (Eric Enstrom)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백발이 성성하고 야위고 남루한 옷을 입고 몹시 지쳐 보이는 노인이 들어왔습니다. 그 노인은 사진관에 들어와 잠깐 쉬면서 테이블 앞에 앉아 초라한 보따리를 꺼내 식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노인은 빵 반쪽과 스프를 앞에 두고 두 손을 모은 채 먼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사진사 엔스트롬 씨는 그 모습을 보고 큰 감동과 전율을 느꼈습니다. 작은 것에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초라한 노인이 아주 큰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삶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그의 감사기도 속에서 세상 그 누구보다 부유한 사람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노인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후에 이 흑백 사진을 보고 엔스트롬 씨의 딸 로다 나이버그(Rhoda Nyberg)도 감동을 받아 유화로 그렸습니다. 엔스트롬 씨는 이 사진을 통해 당시 세계 제1차 대전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 감사할 것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네소타 사진전에 출품하여 미네소타주의 사진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The Grace”, 바로 “은혜” 또는 “감사의 기도” 라고 불립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면서 감사를 회복했으면 합니다. 감사의 기도를 회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기쁜 일이 있기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에 감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걱정이 없기에 감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라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며 모든 사람을 용서하며 모든 일에 염려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에 놀라운 능력과 역사가 있습니다. 그 놀라운 능력과 역사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