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느헤미야 2:11-20 예화) 홍수환의 4전 5기 이 사진은 4전 5기의 신화를 만든 홍수환과 카라스키야가 40년 만에 만나 찍은 것입니다. 1977년 11월 26일에 홍수환은 파나마에서 엑토르 카라스키야와 WBA 주니어페더급 초대 챔피언 타이틀을 얻기 위해 링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2라운드에만 4차례 다운을 당해 더 이상 시합을 해도 승산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3라운드에서 KO로 승리를 했습니다. 그가 승리를 거둔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4번이나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예빛교회의 장로로 교회에서 간증을 하고 많은 기업과 군부대를 다니면 4전 5기의 인생에 대해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4번 넘어졌지만 5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의 인생을 일어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일어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일어나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헌신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어나야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일어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일으켜 세우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12절은 ‘밤에 일어나’, 18절은 ‘일어나 건축하자’, 20절은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라고 합니다. 그것은 ‘일어나’ 라는 것입니다. 이 ‘일어나’는 ‘건축’이라는 단어와 함께 느헤미야서의 핵심적인 단어입니다. 예루살렘의 불에 탄 성문과 무너진 성벽이 다시 세워질 수 있엇던 것은 일어난 사람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일어나면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일어나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데 있습니다. 일어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일어나 다시 세울 수 있었습니까? 첫째, 먼저 일어났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바사의 군대를 이끌고 성벽 재건을 위한 재목을 갖고 왔다는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흘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했습니까? 12절은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도착하여 사흘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주신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밤에 일어났습니다. 몇 사람들과 함께 집을 나갔습니다. 그 시간은 그가 탄 짐승 외에는 아무 짐승도 없는 밤중이었습니다. 그 밤에 느헤미야는 골까지 문으로 나가서 제단의 배를 버리는 분문을 거쳐 연못이 있는 샘문을 지나 왕의 연못이라는 실로암을 거쳐 다시 골짜기 문을 통해 돌아왔습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성벽은 다 무너졌으며 성문은 불에 타 나귀조차도 지나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일어났습니다. 그가 먼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형편에 대해 거룩한 슬픔과 근심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성문과 성벽을 세우려는 거룩한 소원을 품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누사 교회를 위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입니다. 기도하는 성도입니다. 비전을 품은 성도입니다. 특히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사흘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엇을 했습니까? 12절에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이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신 것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문과 성벽을 일으켜 세우는 사명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우리의 마음에 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감동하게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위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다른 성도들보다 먼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먼저 헌신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기도하고 소원을 품고 먼저 일어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함께 일어났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과 제사장들과 귀족들과 방백들에게 자신이 해야 할 일에 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을 밤중에 돌아보고 난 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17절과 18절은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성이 황폐하고 성문이 허물어져 있었지만 그 누구도 건축하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에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18절은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라고 합니다. 그들은 느헤미야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했습니다. 그들은 일어나 건축하자고 했습니다. 먼저 느헤미야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함께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은 누구 한 사람이 하는 것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일어나 세워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일어났으면 합니다. 함께 손을 잡고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일은 선한 일입니다. 선한 일이기에 함께 힘을 내어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 보도 서로를 격려하며 칭찬하며 존중하며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시기를 원하셨던 교회를 함께 세우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그럼에도 일어났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을 모든 사람들이 좋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10절은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고 합니다. 그들은 호른 사람 산발랏이었습니다. 그의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였습니다. 그들은 느헤미야가 이스라엘을 흥왕시키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려고 하자 어떻게 했습니까? 19절은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라고 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예루살렘 재건을 위해 일어난 느헤미야와 백성들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들에게 성을 재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비웃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것은 바사 왕 아닥사스다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문과 성벽을 일으켜 세우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업심 여김과 비웃음과 이간질과 모함을 했습니다. 그들의 방해는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 끝날 때 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20절은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고 합니다. 그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럼으로 일어나 건축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의 무시와 비난과 모함에도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방해에 다시 힘없이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어났으며 다시 세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어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많은 성도들이,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습니다. 왜 다시 일어나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신앙을 세우지 못하고, 인생을 세우지 못할까요?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첫째, 악한 마귀의 방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교회나 성도들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냥 슬퍼하고 울며 주저앉아 있기를 원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기를 원합니다. 낙심하고 절망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귀의 역사와 유혹을 이기고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육체의 본성을 따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더 편안하고 쉽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더 앉고 싶고 눕고 싶고 자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불편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육체의 소욕이 일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더 이상 주저앉아 있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주저앉아 있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무너져 있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절망가운데 있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항상 일어나 있던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항상 역동적으로 역사하던 교회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질병에 걸리고, 실패를 하고, 낙심과 절망 가운데 몸부림을 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던 교회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교회가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성전 미문 곁에 나면서부터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가 구걸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사도행전 3장 6절과 7절은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라고 합니다. 그가 일어나 걸을 뿐만 아니라 뛰어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이 이름의 능력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손을 잡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손잡아 주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주저 앉아있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일어나고, 함께 일어나고, 그럼에도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손을 잡아 주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일어나고, 신앙도 일어나고, 교회도 일어나고, 나라도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일으켜 세우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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