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열왕기상 18:30-40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이스라엘에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삼 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합을 만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아합이 통치하던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했었습니다. 아합은 왕궁을 맡아 관리하던 오바댜를 불러 물의 근원과 시내를 찾으면 자신의 말과 노새를 먹일 물과 꼴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오바댜의 인도로 엘리야는 아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합과 엘리야는 어떤 대화를 나누었습니까? 17절과 18절은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고 합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보고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자신이 아니라 아합이 괴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아합과 그의 아버지가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바알의 우상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합의 주장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자성어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고 합니다. 이는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뜻으로 ‘잘못한 사람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을 도리어 나무라는 것’입니다. 또한 심리학의 방어기제는 무엇입니까? 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투사는 ‘자신의 감정, 욕구, 불안 등을 현재 경험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 사물, 혹은 상황에 부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이 기근을 당하고 힘들어진 것을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 엘리야의 예언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기에 회개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합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엘리야로 인해 괴롭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합의 이런 감정과 행동은 우리에게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괴로움, 가정의 괴로움, 직장의 괴로움, 교회의 괴로움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혹시 나로 인해 괴로운 일과 현상이 생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객관화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황이나 환경에 일어나는 괴로움, 불편이나 고통이 평안과 행복으로 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있는 괴로움을 해결할 방법을 아합에게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상 숭배자들과의 대결을 제안했습니다. 19절과 20절은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이스라엘과 이세벨에게서 얻어먹고 사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모이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들이 그들의 신께 기도하며, 한편 엘리야는 여호와께 기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불로 응답하는 신이 바로 참신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우상 숭배자들과 영적 대결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에 아합은 사람을 보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 850명을 갈멜산에 모이게 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의 제안에 흔쾌히 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고 치명적인 실수로 비참한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둘째, 하나님 백성들의 결단을 요청합니다. 21절은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가 제안한 갈멜산에서의 영적 대결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런 백성들을 향해 “당신들은 언제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작정이오? 만일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여호와를 섬기고,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바알을 섬기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리야의 결단에 흔쾌히 대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선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마 사마리아에 있었던 혼혈 인종과 종교 혼합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입니다. 마귀와 하나님 사이에서,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불경건과 경건 사이에서 머뭇머뭇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엘리야가 제단을 쌓고 기도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제물로 하여 그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며 춤을 추며 소리를 질렀으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런 바알의 선지자들을 엘리야는 비웃었으며, 그들은 정오가 지나고 저녁 제사할 때까지 미친 듯이 부르짖었으나 아무 응답도 없고 대답하는 소리도 없었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가까이 모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돌을 가져다가 무너진 하나님의 단을 다시 쌓고 주위에 물 15리터를 부을 수 있는 도랑을 파고 단에 나무를 쌓았습니다.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에 올려놓고 물 네 주전자를 가져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세 번이나 부었으며 물이 단에 넘쳐흐르고 도랑에도 가득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37절과 38절은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응답을 구했습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을, 하나님이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뭇가지와 돌과 흙을 태웠고 구덩이에 고인 물마저 다 말려 버렸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모든 백성들이 엎드려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기손 시내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예배와 기도를 받으신 분입니다. 그의 기도에 불로 응답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친히 드러내신 분입니다.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돌아오게 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엘리야의 하나님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 누구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될 때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통해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엘리야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까? 첫째, 결단입니다. 21절은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머뭇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 따를 것을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믿음의 결단을 요구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어떤 결단을 요청했습니까? 여호수아 24장 15절은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라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앞에 두고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좋은지, 우상을 섬기는 것이 좋은지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여호수아와 집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도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머뭇머뭇하지 말고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생활은 취미 생활이 아닙니다. 시간이 나고 마음이 들고 상황과 환경이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신앙이 귀하고 복된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시간에 여유가 없어도, 건강이 좋지 않아도 환경이나 상황이 허락되지 않아도 결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택과 결단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실상은 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 못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것이지만 결단하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섬길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지금 할 수 없다는 생각과 믿음을 버리고 할 수 있다는 거룩한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37절은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발했는지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놀라운 역사를 경험할 수 있게 합니다. 야고보서 5장 17절과 18절은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비범하거나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 즉 성질과 마음이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자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기도하자 비가 내리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가 비범한 존재가 되고, 특별한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무엇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특별하시며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 믿음의 기도를 했으면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엘리야의 하나님만으로 머무르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만을 경외하기로 결단하셨으면 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으면 합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만난 하나님, 엘리야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