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할 때 담대할 수 있다 사도행전 4:23-37 예화) 윈스턴 처칠의 용기 영국의 수상 원스턴 처칠은 유명한 명언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중에 “성공이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열정을 잃지 않는 것이다. 실패는 절대로 치명적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용기다. 용기는 인간이 지닌 첫 번째 자질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 하나가 모든 자질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아마 그는 용기가 있으면 실패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실패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도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용기입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용기입니다. 그런 용기가 우리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베드로와 요한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더 옳은 것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담대할 수 있었던 핵심은 성령 충만에 있었습니다. 오늘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에 관해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특히 그들이 어떻게 담대할 수 있었는가? 그 담대함으로 무엇을 했는가? 를 생각했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유대 지도자들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에서 풀려 나와 성도들에게로 갔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12장 5절은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는 위기를 만났을 때 항상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에게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자신들을 위협하고 경고한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첫째, 그들은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24절은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라고 합니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의 위협과 경고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한마음이 되는 것은 쉽기도 하지만 어렵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내 자신의 정욕적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소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지 않고는 교회는 분열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위기 상황 속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언제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모든 성도들이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교회가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하는 것은 큰소리로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기는 위기를 만날 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갑자기 미친 척하며 대문짝을 긁적거리며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절망하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시편 34편 6절은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곤고한 자라고 합니다. 이는 형편이나 처지가 어렵고 고생스럽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통당하고 쫓기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다윗은 기도하는 사람이었기에 어떤 고난과 환난을 겪을지라도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이것 때문에 기도하지 못하고, 저것 때문에 기도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저런 이유와 상황으로 기도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까? 마귀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이유를 들어 기도할 수 없게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진정한 신앙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 어떤 환경에서도 결코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용기입니다. 때로는 건강 때문에, 바쁘기 때문에, 고난 가운데 있기 때문에, 위기를 만났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상황이나 환경이기 때문에 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며 상황과 환경을 극복하고 돌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들은 적극적으로 기도했습니다. 28절에서 30절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모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현재 자신들이 처한 위기 상황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위협을 극복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비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무엇을 위해 기도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권능의 손으로 병을 치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적극적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의 진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악한 마귀와 세상 사람들의 도전 앞에 움츠러드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복음을 전함으로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줄 믿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31절은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합니다. 그들이 모인 곳이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수요일에 모여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모여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기도할 때 모인 곳이 진동했으면 합니다. 모두 성령 충만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기도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33절은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라고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성도들은 기도하고 성령 충만을 받아 큰 권능으로 예수님의 부활, 즉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모든 죄인은 무엇으로 구원을 받습니까? 모든 성도들은 무엇으로 살아갑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있어야 영생을 얻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평안과 행복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헌신과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 충만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32절은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합니다. 34절과 35절도 같은 행동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나누어 사용했습니다. 자기의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밭과 집을 팔아 판 값을 사도들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은혜 충만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소유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교회 중심으로, 연약한 사람 중심으로 삶을 전환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큰 은혜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나의 필요를 포기하는 거룩한 용기와 삶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중에 누가 있었습니까? 36절과 37절은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고 합니다. 함께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고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지 않는 사람 중에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그는 구브르 출신의 레위 사람이었습니다.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는 데, 사도들이 바나바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사람들을 잘 위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그가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4절은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고 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바나바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큰 은혜를 받고 복음을 전하는 자를 통해 믿는 자들이 늘어나며 교회가 온전히 세워지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그런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객기 있는 사람과 용기 있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객기 있는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반면에 용기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그는 바나바로 사랑을 베풀고 복음을 전해 많은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담대할 수 있습니다. 복음과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담대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 담대함, 즉 거룩한 용기를 갖고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다른 사람의 필요에 민감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 섬겨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용기를 갖고 포기하고 섬기며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