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의 진보를 이루라 사도행전 18:1-4 예화) 새벽 만나 사역에의 헌신 2013년부터 10년간 새벽에 대학생과 청년들에게 아침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는 성복중앙교회가 있습니다. 새벽 만나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은 ‘콩자반’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학교 내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예산을 했던 3,000원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식판에 올려놓았던 콩자반을 내려놓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청년의 말이 다음날 새벽기도를 하는 길성운 목사의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길성운 목사는 “눈물이 났습니다. 그 친구의 어려움을 덜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침밥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은 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재료준비에 필요한 예산은 물론이고 새벽마다 밥을 짓고 배식할 사람을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고려대학교 앞에서 식당을 운영하셨던 김희정 권사가 자원했습니다. 매일 새벽 3시에 교인 5명이 5개 조로 식사를 준비해서 제공했습니다.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은 교회에서 주무시고 헌신을 합니다. 성도들이 식재료를 후원하지만 새벽 만나를 위해 일 년에 약 5천만 원이 들고 있습니다. 매일 약 100명의 대학생과 청년들이 식사했으며 지금은 코로나 19로 도시락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아침밥을 줄 수 있을 것 갔느냐’ 는 질문에 길성운 목사는 “새벽 만나를 이용해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익을 추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면, 그 순수성을 잃어버린다면 그때는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했습니다. 새벽 만나 사역은 시간과 재정을 비롯하여 헌신한 성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들의 순수한 신앙과 마음과 수고가 있었기에 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이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헌신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것을 희생하고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몸과 시간과 재물을 드려 헌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믿음이 진보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과 교회와 복음을 위한 헌신에 있습니다. 오늘은 믿음의 진보에 있어 헌신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배자요 헌신자였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온전한 헌신자였던 아내 브리스길라와 남편 아굴라 부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더 나은 헌신자로 어떻게 살았는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헌신의 진보를 살펴보며 우리도 온전한 헌신자가 되어 더 나은 헌신을 하기로 결단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통해 발견하는 헌신의 진보는 무엇입니까? 첫째, 신앙생활을 위한 결단입니다. 1절과 2절은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라고 합니다.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아굴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본도 출신의 유대인으로 아내는 브리스길라였습니다. 그들이 고린도에 오기 전에는 로마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들을 향해 로마를 떠나라고 했습니다. 이에 아내와 함께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몇 년 동안 로마에서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신앙생활을 위해 로마를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신앙을 버리느냐? 아니면 신앙을 위해 떠나야 하느냐?를 결단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위해 로마를 떠나는 결단을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헌신은 무엇으로부터 시작합니까? 신앙생활을 위한 위대한 결단에 있습니다. 우리가 더 나은 헌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신앙적인 결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떠나는 결단을, 머무르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때로는 추구하는 결단을, 포기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시편 23편을 패러디하여 ‘TV는 나의 목자시니’ 라는 글이 있습니다. “TV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붙들어 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는 아무것도 못 하게 하네. 나의 모든 여가를 송두리째 빼앗아 가네. 그것은 세상 것들에 대한 나의 지식을 쌓아 주지만 하나님의 말씀 공부와는 멀어지게 하며 그 소리와 영상이 나를 평안케 하네. 비록 내가 백 살까지 산다 해도 TV가 계속 있는 한 나는 계속 시청할지니 진실로 내 인생에는 아무 유익이 없으리로다.” TV를 끄는 결단이 신앙생활을 위한 결단이 될 수 있습니다. TV를 끄면 신앙생활에 청신호가 켜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헌신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있습니까? 그것을 버리고 떠나는 결단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인생과 신앙에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은 헌신을 위한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 나은 신앙을 위해, 더 나은 헌신을 위한 거룩한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복음을 위한 동역입니다. 3절과 4절은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고 합니다.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 함께 생활하며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천막을 만드는 것은 전문적인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천막 만드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생업을 나타내는 헬라어 τέχνη(테크네)가 ‘직업, 혹은 기술’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천국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런 바울의 곁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동역자로 함께 했습니다. 동역자는 συνεργός(쉬네르고스) 로 ‘함께 일하는 사람, 또는 동료’를 의미합니다. 로마서 16장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비롯한 33명의 동역자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 외에도 구체적으로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매우 탁월한 복음 전도자였으며 목회자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복음과 교회를 위해 헌신할 때 혼자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헌신할 때 혼자서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헌신의 진보, 즉 더 나은 헌신은 함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어떤 동역자였습니까? 로마서 16장 3절과 4절은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고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바울의 헌신적인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의 목숨을 위해 자신들의 목까지 내놓았습니다. 이에 바울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의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헌신은 무엇에 있었습니까? 재정과 사역에 있었습니다. 3절은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고 합니다. 그들은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함께함으로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얻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필요한 재정을 얻었습니다. 18절은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고 합니다. 바울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리는 고린도에서 일 년 육 개월을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갈리오가 아가야 지방의 총독이 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합심하여 바울에게 몰려가 재판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에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과 작별을 하고 배를 타고 수리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길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동행했습니다. 때로는 교회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던 사람이 힘들고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때 함께 곁에 있어 주어야 합니다.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더 나은 헌신은 함께 재정을 감당하고 사역의 현장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이해 결단을 넘어 함께 동역하는 헌신의 진보를 이루어야 합니다. 더 나은 헌신자로 살아야 하는 줄 믿습니다. 셋째, 거룩한 영적 영향력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자 에베소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에베소에 돌아올 것이라고 하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남겨 두고 떠났습니다. 바울이 떠난 후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어떻게 했습니까?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볼로라는 유대인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있는 에베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상업의 중심지요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인 B.C. 280년경에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서인 70인역(LXX)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곳 출신의 아볼로는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천부적인 언변과 풍부한 학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언제 누구에게서 주의 도, 즉 예수님의 말씀을 배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한 것을 열심히 자세하게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아볼로가 복음의 핵심을 잘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로는 아볼로를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26절은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고 합니다. 아볼로가 회당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에 관해 전하는 것을 듣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주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도, 즉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더 정확하게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불로는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와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으로 인한 복음의 핵심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27절과 28절은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고 합니다.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려고 하자 신자들은 그를 격려하고 아가야에 있는 신자들에게도 편지를 써서 영접해 주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아볼로는 아가야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큰 유익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볼라가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유대인들과 복음에 관한 토론을 통해 입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헌신으로 인해 아볼로는 복음의 핵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영혼을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었습니다. 헌신의 진보는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만 신앙생활을 잘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다른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게 유익을 주는 데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 자신보다 더 나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더 나은 헌신자를 양육하는 데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보여주는 헌신의 진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단과 동역과 영향입니다. 신앙생활을 위해 위대한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포기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함께 복음을 전하고 함께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나은 성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더 나은 헌신자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헌신의 진보가 있기를 원합니다. 더 나은 헌신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더 나은 헌신자로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