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통일성 에베소서 4:1-6 교회는 새로운 사회입니다. 성도들은 새로운 사회의 시민입니다.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해 교리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이 조화를 이루어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에서 3장은 새로운 사회로서의 교회가 설립된 교리적인 설명입니다. 4장에서 6장은 성도들이 새로운 사회의 시민으로 사는 생활에 대한 실천적인 부분입니다. 그것을 연결하기 위해 바울은 ‘그러므로’ 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라는 단어를 통해 새로운 사회로서의 교회와 그 구성성원으로서의 성도들의 신앙과 삶에 대해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은 교훈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교회의 일치성, 혹은 통일성이라고 합니다. 성경적인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부흥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영향력이 있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나 된 교회입니다. 교회가 갈등하고 분열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부흥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부흥하고 성장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성도들이 행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교회를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무엇을 권면하고 있습니까? 1절은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로마서 8장 30절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고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를 위해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적인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소명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분명한 소명이 있었기에 복음과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자신을 미워하고 비판적이고 비협조적인 사람들이 있었지만 헌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으며 더 많이 헌신하면서고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부르심에 순종하며 살았을 뿐만 아니라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해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것은 소명감을 갖고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아픔 중의 하나는 교회와 성도들의 갈등과 분열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 되게 세우는 것이 적절하게 행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그런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앞에 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갖고 다른 성도들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까? 2절과 3절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고 합니다. 첫째, 겸손입니다. 겸손은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큰 미덕이며 교만은 가장 큰 악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며 교만은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겸손한 삶은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고 합니다. 예수님께 사람의 모양을 오신 것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자신을 낮추시는 최고의 겸손이었습니다. 또한 겸손은 예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마음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어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에게 쉼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겸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기 위해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함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우리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자로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겸손은 우리를 기도와 헌신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겸손한 마음을 갖고, 겸손한 태도로 대할 때 교회를 하나 될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물과 같이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그 겸손함이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온유입니다. 성경에서 온유는 굉장한 힘을 가진 짐승이 잘 길들어 있는 상태로, 그 큰 힘을 잘 조절하여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고 합니다.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고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도전했을 때 그들과 같이 비방하지 않았으며 미리암이 나병에 걸렸을 때 긍휼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갈라디아 6장 1절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고 합니다. 교회 안에 어떤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그것을 들추어낼 것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도 그런 죄악을 행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온유한 마음을 갖진 성도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교회를 유익하게 합니다. 셋째, 인내입니다. 인내, 즉 오래 참음은 유혹과 고난을 끝까지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6절은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 합니다. 바울은 교회의 박해자요 그리스도인들의 폭행자였습니다. 그는 괴수 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구원을 받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긍휼하심과 인내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바울도 자신을 핍박하고 모함하고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향해 인내했습니다.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으며 복음 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도 여러 가지 환난과 역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아프고 힘들에 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깊은 상처를 받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쉽게 분노하고 상처를 받고 헌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상처와 고난에 대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분노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럴 때 조용히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핍박과 조롱을 당하시면서 분노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죄를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가시 면류관에 의해 흘리신 피 사이로 원망하지 않고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넷째, 용납입니다. 용납은 자신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현상 중에 조심할 것은 자신과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은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라고 합니다. 종종 내 생각과 마음과 다른 것을 틀렸다고 생각해서 비난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와 다른 신앙적인 신념이 있다고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나의 기준이 하나님이 기준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용납은 인간적으로는 어렵지만 신앙 안에서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과 14절은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할 것이 아니라 서로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불만과 불만족한 것을 극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용납을 일방적으로 요구할 것이 아니라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바울은 교회가 하나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욕구와 필요가 모두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는 그런 이유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갈등하고 분열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하나 될 수 있는 강력한 것은 무엇입니까? 3절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고 합니다. 성령에 의지하여 하나가 되도록 항상 힘쓰고 서로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사랑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가 평안하기를 원하십니다. 평안한 교회에 거룩한 부흥의 은혜와 역사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더욱 성령 충만함으로 우리 서로 겸손하고 온유했으면 합니다. 인내하고 용납했으면 합니다. 그런 성도들이 될 때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가 반드시 하나 되어야 하는 이유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6절은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같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소망도 하나입니다. 주님은 한 분이며, 믿음도 하나고, 세례도 하나입니다. 또한, 우리 모든 사람 위에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모든 지체들을 꿰뚫어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도 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사랑하며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용납함으로 성도들과 교회를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 명령과 소명에 순종함으로 모든 성도들이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 평안하고 부흥의 은혜와 역사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