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찬송할 이유 베드로전서 1:3-7 예화) 생명을 살린 찬송 찬양 사역자 생키는 부흥사 무디 목사와 사역을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어느날 여객선을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여’ 를 불러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이에 생키가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찬송을 듣고 있었습니다. 생키가 찬송을 마쳤을 때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인사를 하며 ‘혹시 남북전쟁을 할 때 북군으로 참전을 한 적이 있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생키가 그런 적이 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생키가 부른 찬송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사람은 남군으로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근무를 하고 있을 때 사정거리에 북군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방아쇠를 당겨 사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이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찬송은 생키가 여객선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불렀던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여’ 였습니다. 그리고 그 찬송은 방아쇠를 당기려던 어머님이 자부 부르시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도저히 찬송을 부르는 생키를 향해 총을 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찬송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알기에 사람을 죽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찬송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 하나님을 드러내며 높이는 것입니다. 찬송을 하는 사람도, 찬송을 듣는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발견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평소에도 찬송을 하고 들으셨으면 합니다. 특히 예배 중에 찬송을 하고 찬양대의 찬송에 귀를 기울이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충만하고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무엇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3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베드로는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산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어떤 존재였습니까? 에베소서 2장 1절은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즉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악으로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았습니다. 땅 위의 권세를 잡은 마귀의 세력을 따라 살았습니다. 죄 된 본성을 좇아 행하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온갖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기에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영원히 죽어야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3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라고 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원한 사망에서 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절망이지만 영생은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것은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사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의 절망이 아니라 영생의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둘째, 하늘의 유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의 진정한 소망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잇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4절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위해 하늘에 간직하신 것입니다. 이는 공간적인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천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변하지 않은 천국을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천국이 영원한 유업인 것은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성도들이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재물과 영화와 권세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안개와 같이 사라질 것이며, 꽃과 같이 시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한 천국을 우리에게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천국의 아버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자, 즉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까? 그렇다면 영원한 천국을 유업으로 얻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혹시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시지 않으신 분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유업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삶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영원한 유업을 주신 하나님을, 즉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 소망을 주시고 천국을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입니다. 그 구원은 우리에게 이미 일어난 역사지만 또한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5절은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고 합니다. 베드로는 말세에 이루어질 구원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원의 미래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강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철저하게 보장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혹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닌가? 끝까지 구원 받은 자로 살아갈 수 있는가? 에 대한 염려를 합니다. 그래서 연약하여 죄를 범하거나 시험을 만나면 신앙이 흔들리고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의 수고나 능력을 얻을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얻는 구원을 하나님께서 지키시며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은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멸망하지 않게 하시며 결코 빼앗기기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로마서 8장 35절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라고 합니다. 바울은 환난도 어려움도, 핍박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도 칼도 예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서도 이미 얻은 구원을 하나님께서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보호하시고 보장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성도들이 마음대로 죄를 지으며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견고한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때로는 시험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게 합니다. 우리의 산 소망과 천국의 유업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이에 베드로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만나는 시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험에 대한 성도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6절은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라고 합니다. 마귀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방해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험을 합니다. 베드로 당시에는 신앙의 핍박과 박해였습니다. 하지만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의 유혹과 영적인 태만입니다. 육체의 쾌락과 신앙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는 분주하지만, 신앙적으로는 게으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시험으로 인해 잠간 근심할 수 있습니다. 잠시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시험은 신앙생활에 유익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험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7절은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고 합니다. 시험을 통해 경건한 성도들은 믿음의 확실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로 연단을 받은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그 무엇보다 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수 있게 합니다. 신앙생활에 시험이 없는 성도들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 시험에 대한 반응입니다. 나아가 시험을 통해 얻는 유익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시험은 무엇입니까? 신앙 때문에 받는 박해와 핍박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유혹과 영적인 태만입니까? 그 시험을 잘 극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 더 견고하고 온전한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부모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은혜는 생각나지 않고 섭섭함만 생각나기도 합니다. 여자가 엄마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느낄 때가 일생에 세 번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결혼할 때와 아이를 낳을 때와 자식을 결혼 시킬 때라고 합니다. 그런데 엄마의 은혜를 받지 않았다가 그 때 받아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엄마로부터 받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를 잊고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많은 은혜가 부어져야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은혜인지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은혜를 주셨습니까?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천국을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보호하시고 보장하십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고 느끼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더 많은 은혜를 간구하기보다 이미 받은 은혜를 발견하고 생각하고 느끼며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