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하게 살면 고난을 받습니다 디모데후서 3:6-12 예화) 경건 생활 점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도인은 무엇이 다를까요? 또한 온전한 그리스도인과 온전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무엇에 있습니까? 비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신앙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온전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있지만, 불순종과 불경건과 불건덕한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일꾼으로 신앙과 순종과 경건과 건덕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경건하면 생각나는 것은 매일 성경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물론 경건 생활의 시작은 성경을 묵상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묵상이 경건 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경건은 우리들의 신앙과 생활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존 웨슬리는 경건 생활의 점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 나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가? (2) 나는 매 순간 즐거워하며 사는가? (3) 나는 모든 것에 감사하고 있는가? (4) 나는 욕심을 품고 있지 않는가? (5) 나는 두려워하는 것이 있는가? (6)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가? (7)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는가? 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경건한 자로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경건에 대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경건 생활을 점검하고 회복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바울은 말세가 되면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왜곡과 변질입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을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아야 할 대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아야 할 대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아야 할 대상을 사랑하면 어떤 일이 있습니까? 5절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고 합니다.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의 핵심은 경건한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경건은 εὐσέβεια(유세비아) 라고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인한 삶의 태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 생활은 신앙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을 잘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은 경건 생활에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0장 2절은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라고 합니다.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모든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구제했습니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경건 생활에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는 경건에 대해 무엇이라고 합니까? 야고보서 1장 26절과 27절은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고 합니다. 스스로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경건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경건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고 깨끗한 경건 생활입니다.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은 함부로 말하지 않고 적절한 말을 합니다. 재물을 선하게 사용할 줄 압니다. 악한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어디에 재물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경건하지 않게 살았던 사람은 누구라고 합니까? 첫째, 어리석은 여자들입니다. 6절과 7절은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고 합니다. 그 당시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사람들과 유인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인하는 사람들은 거짓 교사들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유인을 받은 어리석은 여자들은 죄를 범하고 여러 가지 유혹에 끌려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항상 배웠으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유인에 넘어가면 신앙이 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어떻게 예수님을 유인하려고 했습니까? 마태복음 4장 8절과 9절은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고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매우 높은 산에 데리고 가서 세상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 주며, 자신 앞에 엎드려 경배하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영광에 끌리지 않았습니다. 마귀의 유인에 넘어가 죄를 범하시지 않았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에게 있는 유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악한 마귀와 사람들로 인한 것일 수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것일 수도, 재물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여자와 같이 유인을 받을 때 욕심에 끌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 욕심으로 인해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고 흔들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얀네와 얌브레입니다. 8절과 9절은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 고 합니다. 바울은 유인을 받아 욕심에 끌려 죄를 범한 얀네와 얌브레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아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세를 대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과 같이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곧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와 복음의 진리를 대적하는 자는 영적 성장과 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부패했으며 믿음에 관해 버림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경건하게 살 수 없습니까? 마음이 부패하여 교만한 사람입니다. 온전하지 않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면에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마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온전한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대적할 것과 대적하지 않을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으면 합니다. 악한 마귀와 죄와 육체의 정욕과 싸워 이길 수 있었으면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승리할 수 있으면 합니다. 그래서 경건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경건하게 사는 것에 대해 무엇을 권면합니까? 10절과 11절은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이 경건하게 살며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 위해 겪었던 것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고난입니다. ❶ 교훈은 바울이 전하고 가르친 복음입니다. 그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에게는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❷ 행실은 바울이 복음대로 살아간 삶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❸ 의향은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목적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한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❹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신앙과 확신입니다. 그는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의지했습니다. ❺ 오래 참음은 바울이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핍박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며 농부가 씨를 뿌리고 열매를 기다렸습니다. ❻ 사랑은 바울의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영혼을 사랑했기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랑은 전도와 헌신의 동기이며 능력입니다. ❼ 인내는 바울이 고난을 끝까지 견디고 참은 것입니다. 그는 복음과 교회를 위해 수고하며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바울은 박해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고니온에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루스드라로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치는 역사를 행했습니다. 그곳에서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박해와 고난 가운데 오히려 바울을 구원하셨으며,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귀한 동역자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바울도 박해와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도들도 박해와 고난을 당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도 박해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박해와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이 박해와 고난을 당할 때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귀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한 박해와 고난 가운데서 건지신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시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엇을 선언하고 있습니까? 12절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언급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는 경건하게 살지 않기에 박해를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에 속한 자는 경건하게 살기에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사는 것이 어려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고난과 박해와 핍박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하며, 세상 사람들의 방식으로 살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9절은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고 합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기 때문에 박해와 고난을 받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박해를 받지 않는 것을 기뻐할 것이 아니라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경건하게 살지 않음으로 고난을 겪지 않는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경건한 삶으로 인해 겪는 고난을 힘들어하기보다는 오히려 자부심을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과 복음과 교회를 위해 불편하게 사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경건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경건하게 사는 데 겪는 박해와 고난을 피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 때 박해하는 자를 미워하고 저주하지 말고 기도하고 축복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는 경건을 연습했으면 합니다. 경건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경건한 생활을 통해 경건한 가정과 교회를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