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13-18
예화) 교통사고의 원인 H&T 차량 기계기술 법인에서 발표한 2020년 자동차 보유 실태 보고서에 의하면 24,365,000대입니다. 이는 인구 2.1명에 1대입니다. 많은 자동차가 있기에 많은 교통사고가 나고 있습니다. 교통사고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운전자와 도로와 차량 요인입니다. 그중에 가장 많은 것은 운전자 요인입니다. 특히 운전자의 사고요인을 교통법규위반 형태로 분류해 보면 안전운전 불이행이 전체 교통사고의 61.3%로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중앙선 침범 6.5%, 신호 위반 6.3%, 안전거리미확보 5.8%, 교차로통행방법위반 5.4%, 보행자 보호 의무 위반 2.7% 순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운전자 요인은 지켜야 할 교통법규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으면 교통사고를 피할 수 없습니다. (자료 H&T 차량 기계기술 법인) 운전할 때만 지켜야 할 것이 있나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킬 때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건강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며 헌신할 수 있습니다. 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지켜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들을 것을 들어야 하고, 반드시 지킬 것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무엇을 지키라고 합니까? 첫째, 바울이 전한 바른 말을 본받고 지키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에 의해 에베소교회를 목회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요한계시록 2장 1절에서 7절은 에베소 교회의 실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신학적인 온전함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여 징계했습니다. 그런데 사랑과 용서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무엇을 책망하셨습니까? 요한계시록 2장 4절은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교회는 신학과 신앙의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종종 진리와 비진리,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판단하려다 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것은 무익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진리와 사랑의 균형이 있는 건강하고 온전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무엇을 권면합니까? 13절은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들려준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킬 것을 권면합니다. ‘지키라’ 는 것은 ἔχω(에코) 로 ‘가지다, 소유하다’ 는 뜻입니다. 그가 들려준 바른 말은 무엇입니까? 디모데전서 6장 3절은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이라고 합니다. 바른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경건에 관한 교훈입니다. 이는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으로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도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경건하게 살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른 신앙 고백입니다. 또한 생활을 통해 신앙 고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술로 믿음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삶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신앙은 생활로 나타나고, 생활은 신앙을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들은 말씀의 본을 받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의 말씀과 교훈을 듣고 지킴으로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령이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14절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부탁하신 아름다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한 복음입니다. ‘지키라’ 는 φυλάσσω(퓔랏소) 로 ‘보호하다, 보존하다’ 는 뜻입니다. 이는 복음이 왜곡되거나 변질되지 않게 보존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에 아름다운 것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니골라에 의해 다른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6절은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고 합니다. 니골라는 당을 지어 악을 행했으며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니골라는 누구입니까? 사도행전 6장 5절은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라고 합니다. 니골라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하나로 유대교에서 입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 벗어나지 못해 잘못된 교리를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순전한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 복음의 순전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현대 철학이나 사상에서 복음을 위협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적 진리를 부인하거나 다양성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예수 그리스도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 다원주의, 인간이 신이 될 수 있거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뉴에이지, 믿음이 아니라 행위가 있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행위 구원론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복음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받은 자로 잘 지키고 전해야 합니다. 언제나 순전한 복음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하며, 그 복음을 또한 전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전한 말씀과 복음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언급하며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전한 말씀과 복음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15절은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중심으로 3년 동안 아시아 전도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통해 말씀과 복음을 들었으며 양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을 버리고 말씀에 불순종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겔로와 허모게네였습니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람인지에 관해서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에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던 바울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로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사 자료에 의하면 그들은 위선에 가득찬 바울의 동료들이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좋아하고 따랐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처럼 버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하고 지지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실망하고 낙심하여 하나님의 교회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일을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는 반대에도, 때로는 섭섭함에도 낙심하지 말고 말씀과 복음을 지키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반면에 바울이 전한 말씀과 복음을 지킨 사람은 누구입니까? 16절에서 18절은 ‘원하건데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부겔로와 허모게네와는 다른 오네시보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울에 대해 어떻게 했습니까? 첫째, 바울을 자주 격려해 주었습니다. 16절은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라고 합니다. 아마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자주 바울을 비난하여 힘을 뺏는데, 반면에 오네시보르는 자주 바울을 격려하여 힘을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도 사람이기에 때로는 지칠 때도 있었으며, 실수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오네시보르는 자주 격려해 주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교회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을 향해 자주 비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자주 격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더 헌신하는 사람에게 용기를 줄까요? 더 깊은 헌신의 길로 갈 수 있게 합니까? 비난이나 비판이 아니라 격려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복음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자들을 자주 격려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둘째, 바울을 자주 찾아와 만났습니다. 16절과 17절은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로마 옥에 갇혀 있었을 때 오네시보르는 만나기 위해 자주 로마에 찾아 왔습니다. 그 당시에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찾아가 만난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과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자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더 가까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큰 힘과 용기를 갖고 헌신할 수 있습니다. 셋째, 에베소교회를 잘 섬겼습니다. 18절은 ‘원하건데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고 합니다. 오네시보르는 바울이 로마의 옥에 갇히기 전에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도 잘 섬겼습니다. 또한 바울이 옥에 갇혔을 대에도 여전히 헌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교회를 섬기는 자리를 지켰습니다. 우리에게도 변하지 않는 수고와 헌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부겔로와 허모게네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오네시브로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반드시 들어야 할 것을 듣고, 믿어야 할 것을 믿고, 지켜야 하는 것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킬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사랑으로써 경건한 자로 살았으면 합니다.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은 순전한 복음을 지켜야 합니다. 복음을 변질시키지 말고 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섬겨야 할 것을 섬기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