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생활(6) : 성령 요한복음 15:18-27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 교훈과 권면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이 거하는데서 부터 시작합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 열매는 기도하고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18절에서 27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미워하다’ 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핵심은 미움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 사랑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미움에 대해 권면을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때로는 사랑이 미움이 되기도 하며, 미움이 사랑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죽을 것 같아 결혼을 했는데, 이제는 죽일 것같이 싸우고 있으며, 그 사람이 아니면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그 사람 때문에 죽겠다’ 는 것입니다. 행복한 부부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은 미움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미움을 성경적이고 신앙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세상과 미움에 대한 이해입니다. 첫째, 세상입니다. 본문에서 세상은 κόσμος(코스모스) 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세계이며, 사람들이 사는 역사의 현장으로서의 장소이며,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이며, 타락한 가치 체계와 조직 등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와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아들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셔서 세상 사람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세상에 있는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사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악한 세상을 이기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 즉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둘째, 미움입니다. 본문에서 미움은 μισέω(미세오) 로 ‘싫어하다, 혐오하다, 배척하다’ 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어떤 대상이나 행동에 대해 갖고 있는 반감만 아니라 적대감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과 세상의 미움을 대조하며 복음과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미움은 빛과 어두움의 차이입니다. 요한복음 3장 20절은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심판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미움은 때로는 악한 행위를 감추기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미움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합니다. 때로는 온전하고 성숙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만한 일을 하기도 합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코로나 19를 겪으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비난을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방송이나 신문 등의 대중 매체에 비추어지고 드러난 것이 사실 인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왜곡되고 과장 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억울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잘못된 것으로 인해 비난과 미움의 대상이 된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는 철저하게 돌아보고 회개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거룩한 변화와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겉으로 나타난 현상이 비난이나 미움의 전부가 아닐 수 있습니다. 18절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고 합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이나 교회를 미워하는 실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초대 교회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회에 악을 행하거나 윤리나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교회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그리스도인인지? 어떤 교회인지? 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싫고 밉고 혐오합니다. 세상의 미움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이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일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혐오의 대상이 될 만할 짓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고 합니다. 때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기 위해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아야 합니다. 경건한 신앙과 삶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고난과 미움은 장래에 나타날 영광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은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절은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타락한 세상이나 악한 마귀의 소유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에서 선택을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불러 하늘에 속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에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합니다. 사람들은 줄을 세우고 편을 가르기 좋아합니다. 그래서 누구는 누구 편이며, 누구는 누구 라인이라고 합니다. 때로는 당사자의 생각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편에 속해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세상 편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세상에 속해 살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에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편 118편 6절과 7절은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편에 속한 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도와주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이에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보응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의 미움을 받을 지라도 항상 하나님 편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하는 오해는 사랑과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인줄 알았는데 집착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인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사람인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미움과 적대감을 갖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이 다른 사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갖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미움과 적대감을 갖고 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제자들에 대한 세상의 미움에 대해 무엇이라고 합니까? 21절은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고 합니다. 현대어 성경은 ‘너희가 내게 속하였다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은 너희를 박해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영적 무지가 결국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적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을 박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잘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한 율법을 바르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법도, 하나님이 찾으시고 받으시는 예배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 즉 그리스도이심을 말씀과 행위와 표적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을 알고 믿는 자는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를 따랐으며 부활과 복음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무지하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을 멸시하고 미워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와 교회를 알지 못했을 때는 박해자요 폭행자요 훼방자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리스도와 교회를 알게 되자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으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섬기지 못하며,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에 믿고 구원 받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함으로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알지 못했기에 핍박했는데 교회를 다니고 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알지 못했기에 멸시했는데 이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사명입니다.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자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헌신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자로 변화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의 미움에 대해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5장 43절과 44절은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이웃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마음이나 결단이나 인내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기에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26절과 27절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고 합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미워하는 그들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보혜사, 곧 진리의 원천이신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도 처음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사랑과 미움은 단순히 감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마음의 찔림을 받는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이를 갈았습니다. 그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큰 소릴 지르고 귀를 막고 달려 들어 돌로 쳤습니다. 그 때 스데반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도행전 7장 59절과 60절은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고 합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돌에 맞으면서 영혼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무릎을 꿇고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잠을 자는 것처럼 평안히 눈을 감고 죽었습니다. 스데반이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한 것은 성령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함으로 미움을 받을 때에도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때 미움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증거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세상의 미움은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당연히 받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 미움으로 인해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더 경건하게 살며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의 미움에 대해 미움으로 반응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을 사랑하며 기도하며 축복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함으로 영적 무지와 죄악과 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미워하는 세상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거룩한 감동과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며 사명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