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 시리즈(3) : 사죄의 확신 요한일서 1:9-10 오늘은 사죄의 확신에 관해 나누려고 합니다. 사죄의 확신은 죄 용서에 대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개념 중에 하나가 죄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죄의 결과는 사망이며, 죄의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이나 감정이나 지식이나 경험을 통한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죄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의 해결자라는 것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은 진리입니다. 인간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받아들일 수 없기에 비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속한 교회는 개혁파 장로교 합동측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죄에 대한 것은 인간론에 들어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자 루이스 벌콥은 인간론을 다루면서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과 은혜 아래에 있는 인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루이스 벌콥은 죄를 원죄와 본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원죄는 무엇입니까? 로마서 5장 12절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고 합니다. 원죄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에게 영향을 준 죄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죄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원죄로 인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원죄의 영향으로 계속 죄를 지으려고 합니다. 이 원죄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함 받은 것을 구원의 서정에서 ‘칭의’ 라고 합니다. 칭의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는 더 이상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와 사망이 없습니다. 본죄는 무엇입니까? 이사야 53장 6절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합니다. 본죄는 원죄의 영향으로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스스로 지은 자범죄를 말합니다. 이 본죄는 성령 역사로 죄를 발견하고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성화의 과정에서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본죄에 대한 회개입니다. 교리적인 의미에서 죄를 원죄와 본죄, 즉 자범죄로 구분을 해서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죄를 좀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는 무엇입니까? 첫째, 불신앙(不信仰)입니다. 요한일서 5장 10절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윤리와 도적, 또는 실정법의 관점에서 죄를 말하지만, 성경은 죄를 신앙적인 관점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 죄입니다. 둘째, 불순종(不順從)입니다. 예레미야 9장 13절과 14절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율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그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순종하지도 않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죄입니다. 셋째, 불경건(不敬虔)입니다. 유다서 1장 15절은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고 합니다. 이는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입니다. 경건은 삶으로 신앙과 순종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룩함과 온전함이 없는 삶의 불경건함이 죄입니다. 넷째, 불건덕(不健德)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3절과 24절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 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하고 싶어도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지 않는 불건덕이 죄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불신앙과 불순종과 불경건과 불건덕의 죄를 짓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고 합니다. 죄 사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대신 흘리신 피로 인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전적인 은혜와 보혈로 인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죄의 근거와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합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자백은 헬라어 호몰로게오(ὁμολογέω)로 ‘법정에서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입니다. 자백의 다른 의미는 회개입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은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라고 합니다. 회개는 복음에 대한 반응이며, 은혜에 대한 거룩한 응답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키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죄의 확신입니다. 죄 용서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죄의 확신이 없으면 죄를 범하면 다른 확신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의 죄를 범하고 그 결과 고난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시편 51편 11절은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라고 합니다. 그는 주의 얼굴을 죄에서 돌이키시고 모든 죄악을 지워 달라고 합니다. 자신을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성령을 거두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범하면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두려웠습니다. 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원하여 하던 헌신의 자리도 떠났습니다. 죄를 범하고 사죄의 확신이 흔들리면 구원의 확신도, 기도 응답의 확신도, 인도의 확신도, 승리의 확신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사죄의 확신을 갖게 되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즐거움과 자신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직분과 사명을 축복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죄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죄를 범하면 그 죄를 계속해서 들추어내고 죄책감을 갖게 하며 용서의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는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12장 9절과 10절은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라고 합니다. 그는 용, 옛 뱀, 마귀, 사탄이라는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는 존재입니다. 마귀는 천하를 미혹하는 존재이며 성도들을 참소하는 존재입니다. 이는 사람들을 미혹하며 죄를 짓게 만들뿐만 아니라, 그 죄를 비난하고 정죄하고 고소합니다. 그래서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며 사죄의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자백한 자를 어떻게 하십니까? 로마서 8장 33절과 34절은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인해 죄 사함을 받은 후에, 그 죄로 인해 진노와 저주하시지 않습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의 죄를 참소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 즉 변호하십니다. 히브리서 10장 17절은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자백한 사람들의 죄에 대한 기억상실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시고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마귀는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게 합니다. 계속해서 죄를 짓게 하고, 죄를 죄로 알지 못하게 하고, 죄를 자백한 후에도 계속 그 죄에 집착하게 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마음으로 죄를 자백하고 사죄의 은혜를 경험한 후에 다시 의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에 대한 용서를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죄의 확신을 갖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자백하면 용서해주셨다고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온전한 삶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죄의 확신을 갖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반복해서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무엇인가를 스시고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던 돌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 여인을 향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요한복은 8장 11절은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하시면서 다시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용서를 받은 자로 다시는 죄악을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죄의 은총을 받은 자는 반복해서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줄 믿습니다. 둘째,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 것은 우리가 죄를 용서하는 삶을 살라는 거룩한 요구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흘리신 피가 나를 용서하기 위한 것임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때로는 죄의 유혹 앞에 힘없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죄를 사하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의 확신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아직 자백하지 않은 죄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진홍 같은 죄를 양털같이 희게 하십니다.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우리의 죄를 멀리 치우십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의 진노와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정죄와 사망에 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죄의 확신을 갖고 죄의 종으로 살지 않았으면 합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유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저주와 심판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서로의 죄를 용서하며 죄의 유혹을 이기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