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 시리즈(2) : 구원의 확신 요한일서 5:11-12 예화) 이상구박사의 구원의 확신 제칠일 안식일교회에서 35년 넘게 활동했던 이상구 박사는 2018년에 안식교 탈퇴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안식교 홍보대사로 손꼽히던 그의 탈퇴는 안식교뿐만 아니라 이단 연구가들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가 성경을 알면 알수록 안식교의 교리에 대해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 이상구박사가 탈퇴를 결심한 것은 자신을 찾아 온 암 환자를 만나면서 부터였습니다. 어느 날 안식교의 신실한 집사가 육종 암에 걸려 2개월 밖에 못산다며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심각하게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모르겠다며 토로했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짚어가면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구원의 확신을 얻고 완치되었습니다. 이상구 박사만 아니라 그 집사님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불안해하고 기뻐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는 구원의 확신이 주는 능력과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확신을 주지 못하던 안식교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확신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초가 되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 나누며 은혜를 경험했으면 합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뿐만 아니라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성경적인 구원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접하면서 가장 먼저 듣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할 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복음을 들을 때 듣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입니다. 그런데 구원하면 떠오르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죽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단순히 천국에 가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구원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구원은 생명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과 5절은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시면서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와와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죽어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었으며 결국 육체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바울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22절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 합니다.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들입니다. 이에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함으로 구원 받는 자들이 많아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구원은 회복입니다.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고 혈루 근원이 마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마가복음 5장 34절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향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받은 구원은 무엇입니까? 그를 12년 동안 고통스럽게 하던 혈루병에서 치유 받은 것입니다. 그의 구원은 병에서 놓여 건강을 회복한 것입니다. 구원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4장 24절은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고 합니다. 주님은 복음을 선포하시며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상처를 싸매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구원의 거룩한 은혜와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구원은 구출입니다. 마태복음 14장 30절과 31절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붙잡으셔서 건지셨습니다. 구원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잡으시고 건져 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환난 당한 자를 어떻게 하십니까? 시편 50편 15절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라고 합니다. 구원은 악한 마귀의 손에서 건지시고, 삶의 기근과 곤고함에서 건지시고, 환난과 역경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구원하시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구원은 단순히 영적인 것만 아닙니다. 인간의 육체와 환경이나 상황에서의 구원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구원은 전인격적이고, 전영역적인 것입니다. 구원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육체가 연약함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상황과 환경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계속해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구원의 필요성입니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로마서 3장 10절과 23절은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모든 사람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모든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과 불행은 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없이는 생명이 없습니다. 행복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베드로전서 3장 18절은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죄를 위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대속적인 죽음이라고 합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께서 불의한 사람을 대신하셨습니다.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여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로마서 10장 9절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라고 합니다. 우리의 입술로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며 생명의 부활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영접한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영접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믿고 인정하며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음으로 악한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구원의 결과요 축복입니다. 이제 구원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아버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구원 받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결코 떠나시거나 버리시지 않습니다. 항상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시험과 환난을 당할 때 외면하시지 않으시며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절대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결코 사망에 이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육체의 소욕이나 정욕에 이끌려 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살지 않을 때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하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악한 마귀가 참소를 합니다. 사람들이 비난을 합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실망을 하고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3. 구원의 확신은 무엇에 있습니까? 구원을 받은 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확신이 없거나 흔들리는 것은 확신을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행위에 근거를 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확신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첫째는, 사실입니다. 요한일서 5장 11절과 12절은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고 합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마음에 영접하고 입으로 시인을 했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셔서 영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이나 감정이 아니라 사실이며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영접한 사실에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약속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은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에 영원히 멸망을 당하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 결코 구원 받은 자들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기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구원 받은 자들에게 하신 불변의 약속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유익과 상황에 따라 약속을 깨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실하신 분으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십니다.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철저하게 신실하신 주님의 약속에 근거하는 줄 믿습니다. 셋째는, 능력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9절은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고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구원 받은 성도들을 아들 예수님께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물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능력과 권세가 탁월하신 분이십니다. 이에 아무도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서 구원 받은 자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자들을 끝까지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연약한 의지나 능력에 두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구원의 확신을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확신이 없다고 구원 받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할까요? 구원의 확신이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구원을 확신을 가지면 신앙생활이 불안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삶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헌신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성장하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혹시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자주 흔들리고 있습니까? 구원의 확신을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때로는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질 수 있습니다. 흔들리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갖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