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열심을 내라 갈라디아 4:12-20 예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2000년대 초에 했던 광고 중에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그 광고는 현대카드의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입니다.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한 직원이 카드를 손에 들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 광고의 내용입니다. 그 광고를 낸 회사에서 임직원의 여행 수기를 엮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책을 발간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은 ‘글로벌 배낭 여행’ 프로그램을 경험한 직원들의 이야기 50편을 하나로 엮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열심이라는 단어는 가슴이 뛰고 흥분하게 하는 것이며, 반면에 무거움 부담감과 압박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열심이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생각과 느낌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중심 단어가 무엇입니까? 17절과 18절은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고 합니다. 그것은 열심입니다. 열심은 ζηλόω(젤로오) 로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과 태도’ 입니다. 이는 능동적으로 열정을 갖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에 열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열심히 방향이나 목적을 잃으면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이 아니라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열심을 가진 세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바울과 성도들과 악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가진 열심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들의 열심히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도전은 무엇입니까? 첫째, 바울의 열심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과 같이 되었으며, 이방인을 위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는 그 당시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우월감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로마서 11장 13절은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직분을 받았으며, 그것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에 유대인으로서의 모든 것을 특권을 버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버릴 때 온전한 헌신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특히 그의 복음에 대한 열심을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13절은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고 합니다. 바울은 육체적으로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육체의 약함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좋은 상황, 좋은 환경,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어야 헌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육체적인 연약함이 복음을 전하는 데 문제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열심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그에게 있었던 열심은 환경과 상황과 건강을 초월하는 헌신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건강이나 환경을 이유로 헌신의 자리에서 멀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환경이나 건강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 복음을 향한 열심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도들의 열심입니다. 바울이 연약한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본 성도들은 어떠했습니까? 14절은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라고 합니다. 바울의 연약함은 성도들에게 시험, 즉 짐이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그것을 짐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바울은 업신여기지도 않았으며,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분으로 영접했습니다. 바울이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복음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사 누가는 바울의 곁에서 평생을 함께하며 복음을 전하는 길에 동행자요 동역자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연약함을 품어 주었으며 안아 주었습니다. 교회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연약함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의 육체의 연약함을 비난하며 수용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성도들은 바울의 연약함을 전혀 문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주를 위해 수고하며 헌신하는 자들에게 너무 완벽함을 요구하지는 않습니까? 그들도 연약할 수 있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들의 연약함을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거룩한 짐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연약함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강건함을 주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열심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거룩한 열심은 주를 위해 헌신하는 자들의 연약함을 아파하며 함께 나누어지게 합니다. 그 열심히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그 열심으로 인해 교회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자들이 더 열심을 내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악한 사람들의 열심입니다. 바울의 연약함을 업신여기거나 버리지 않고 영접한 성도들이 이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15절은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고 합니다. 그때에는 기쁨이 가득했지만, 이제 그 기쁨은 어디에 있느냐? 고 합니다. 전에는 바울을 위해 자신의 눈이라도 빼 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과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17절은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고 합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충분하지 않기에 율법의 행위, 즉 할례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인한 구원을 반박하자 좋지 않은 마음을 갖고 바울을 원수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좋지 않은 뜻을 갖고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성도들 사이를 이간시켰습니다. 바울을 배반하고 자신들만 따르도록 유혹하는데 열심을 갖고 성도들을 유혹했습니다. 이들의 열심은 바울의 열심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성도들의 열심과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도 아니었습니다. 특히 그 열심은 복음을 위한 것도 아니었으며, 교회를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열심으로 인해 바울과 성도들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진리의 복음 전파가 중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갈등과 분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열심은 좋은 것입니다. 열심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열심히 무엇을 위한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어떤 동기와 목적을 가진 열심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선한 동기와 목적을 가진 열심히 있기를 원합니다. 교회와 복음을 위한 열심히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며,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자들의 열심에 힘이 되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열심은 여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바울에게 있었던 열심의 변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6절은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고 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고난을 영광과 축복으로 생각했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일을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열심은 변할 수 있습니다. 열심이 있을 수도 있으며 없을 수도 있습니다. 좋은 열심을 가질 수도 있으며 악한 열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열심은 어떠합니까? 혹시 예전의 그 열심히 차갑게 식어있지는 않습니까? 선한 일에 열심을 내지 못하고, 복음과 교회를 위해 열심을 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냉랭하고 차가운 가슴을 안고 힘들어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열심이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해도 식지 않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오히려 더 뜨겁고 간절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열심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첫째, 좋은 열심을 인정했습니다. 18절은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고 합니다. 바울은 악한 열심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좋은 열심은 인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열심 자체는 악한 것도 선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한 열심을 갖고 헌신하는 자들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아가 그들과 함께 선한 열심을 갖고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선한 열심을 갖고 서로 격려하며 함께 교회와 복음을 위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열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19절은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라고 합니다. 바울은 악한 사람들과 그들의 미혹을 받은 사람들이 좋지 않은 열심을 갖고 성도들과 자신의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거룩한 수고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향해 ‘나의 자녀들’ 이라고 하면서, 그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아이를 낳은 해산의 수고를 할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나 태도에 따라 변하는 것은 열심이 아닙니다. 진정한 열심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 처할지라도, 어떤 반대와 반응에 직면할지라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아가 진정한 열심은 좋지 않은 상황이나 환경에 처할수록 그 가치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혹시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열심히 없어졌습니까? 교회를 섬기지 못하며,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누구 때문도 아닙니다. 무엇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열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열심은 사람이나 상황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합니다. 열심은 무엇입니까? 언제 열심을 낼 수 있습니까? 열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사명에 대한 헌신입니다. 우리에게 순종과 감사와 사랑과 사명이 있을 때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어떤 환경이나 반응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는 열심을 주시기 원합니다. 좋은 열심, 선한 열심, 교회를 위한 열심, 복음을 위한 열심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열심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함께 복음과 교회를 위해 열심을 내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