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내 곁에 서 계셨습니다 디모데후서 4:16-22 예화) 완벽한 부모는 없다 “자녀 양육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신의 약점을 노출시키고 신앙을 흔들 수도 있다. 당신이 자녀에게 한 말과 행동 때문에 괴로운 날들도 많을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 기울여온 노력들이 도움은커녕 헛된 일처럼 느껴지는 날도 많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런 당신을 결코 거절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당신의 울부짖음을 더 가까이에서 듣겠다고 말씀하신다.” 이 글은 폴 트립의 “완벽한 부모는 없다” 책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완벽한 자녀도 없습니다. 때로는 자녀를 위한 노력이 헛된 수고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자녀로 인해 실망하고 낙심될 수도 있습니다. 부모로서의 한계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다른 사람이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자녀를 향해 정죄하고 저주하지 않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언약의 자녀를 부탁합니다. 부모로서의 위대함은 완벽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자녀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 부모를 생각하는 자녀는 다시 한번 일어나고 실수와 실패를 극복하고 도전할 수 있습니다. 부모로서의 온전함은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는 자녀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 부모를 생각하고 다시 일어나는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과 만남과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한 사명을 주어 보낸 사람도 있었습니다. 늙고 연약한 바울의 곁에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을 대적하며 사역을 손해를 끼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간절히 보고 싶어 오라고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다양한 사람들로 인해 바울이 상처를 입고 사역의 현장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떠난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하기를 원했습니까? 16절은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고 합니다. 바울이 처음 변명을 했을 때 함께 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처음 변명할 때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된 후에 받은 첫 번째 심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변명은 ἀπολογία(아폴로기아) 로 법정적인 용어로는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주장하는 변론의 의미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는 이단을 반대하며 기독교 정통 교리를 변호하는 변증의 의미입니다. 바울의 변명은 변론과 변증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법정에 선 것은 로마의 법을 범했거나 살인이나 도적질과 같은 죄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인해 고소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바울이 법정에서 변론을 하는 것은 곧 복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변증하며 간증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이에 아그립바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도행전 26장 28절은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라고 합니다. 그는 바울의 변론과 변증을 들으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어떤 장소나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그가 모든 일에 인내하며 가르침으로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라는 것은 복음을 듣고 가르침을 받는 대상을 생각하고 적절하게 전할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우리도 어떤 장소나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복음을 듣는 대상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지혜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며 선교적 삶을 살아가는 것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법정에서 변론과 변증을 할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바울과 함께 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판사들과 배심원들, 군인들, 그를 고소한 사람들이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법정을 채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홀로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하는 변론을 하고, 복음이 진리임을 변증하고 있었습니다. 바울도 인간이기에 그런 상황이 매우 외롭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서운함과 배신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허물은 παράπτωμα(파랍토마)로 ‘정도에서 벗어남, 혹은 범죄’ 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을 떠나거나 버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인으로 죄를 범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을 탓하며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지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외롭고 고통스러울 때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를 떠나고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원망하며 낙심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사명을 버리지 않고 사역의 현장을 떠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바울과 함께 하지 않고 버렸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바울이 용기를 잃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에 있었습니까? 첫째, 예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17절은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고 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은 자신과 함께 하지 않고 버렸지만 주님은 항상 곁에 서서 힘을 주셨습니다. 이에 이방인들에게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을 통해 모든 이방인이 복음을 듣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울이 사람들로 인해 상처를 받고 나심하고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바울과 함께 하지 않고 버렸지만 예수님은 그의 곁에 서서 힘을 주셨습니다. 그가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사람을 보면 낙심하고 실망할 수 있습니다. 심한 상처를 받고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항상 내 곁에 서 계시며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을 때 복음과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사명과 사역을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람을 보고 의지하면 낙심과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보고 의지하면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누구를 보고 있습니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8절은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악한 사자의 입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에서 많은 고난과 환난을 겪을 때 하나님께 건지신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바울에게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악한 일에서 건지시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확신이 있었기에 바울은 사람들로 인해 낙심하거나 상처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사역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바울에게 있었던 구원의 경험과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 고난과 고통을 겪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 주셨습니다. 사방이 암흑과 같은 절망의 터널을 지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깊은 영적 침체를 겪을 때 한 줄기 환한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휘청거릴 때는 붙들어 주셨으며, 넘어져 일어나 힘이 없었을 때에는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절망하는 우리를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요한계시록 21장 3절과 4절은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고 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그곳에는 죽음도, 슬픔도, 울음도, 아픔도 없습니다. 그 천국에 우리를 반드시 들어가게 하실 줄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악한 일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확신을 갖고 이 땅에서 겪는 모든 고난과 악한 일을 극복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고 절망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고 어떻게 합니까? 첫째, 권면합니다. 19절에서 21절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브리스가와 아굴라, 오네시보로의 가족에게도 문안하라고 합니다. 겨울이 되기 전에 빨리 오라고 부탁합니다.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디모데에게 문안하고 있다고 합니다. 둘째, 축복합니다. 22절은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라고 합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디모데의 심령에 주님이 함께 하시며, 주의 은혜가 사랑하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바울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는 법정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헌신의 사람이었습니다. 허물을 돌리지 않는 용서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축복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용서하고, 축복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다. 이제 눈을 들어 우리 곁에 서 계신 주님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언제나 함께 하시며 모든 악인 일에서 건지시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 확신을 갖고 복음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십자가의 사랑으로 허물을 덮어주며, 축복하며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