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방문객/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이 시는 제가 2년 전에 알게 된 것으로 사람과의 만남과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시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만 아니라 신앙생활과 교회 생활을 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이 만남과 관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어떤 만남과 관계를 갖고 살아야 할까요? 바울은 서신서를 마치면서 항상 함께했던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복음과 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면서 가졌던 만남과 관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바울과 함께했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는 사람, 떠난 사람, 보낸 사람, 남은 사람,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을 통해 어떤 만남과 관계에 대한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첫째, 오는 사람입니다. 9절은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고 합니다. 바울이 간절히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디모데입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그 누구보다 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었으며 복음을 위한 동역자였습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처음 만난 곳은 갈라디아 루스드라였습니다. 그때 바울은 복음을 위해 함게 동역했던 바나바와 다투고 헤어졌을 때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선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사람으로 인해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때 디모데와의 만남을 통해 격려하시고 사역에 힘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해 세운 교회들을 방문하도록 자주 디모데를 파송했습니다. 데살로니가와 고린도와 빌립보교회(살전 3:2-3; 고전 4:1; 빌 2:19-24)에 보냈습니다. 바울은 말년에 디모데를 에베소교회에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급히 전갈을 보내 최대한 빨리 오라고 했습니다. 13절은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올 때 드로아에 사는 가보의 집에 둔 겉옷과 특별히 가죽 종이 쓴 책을 가지고 겨울이 되기 전에 오라고 했습니다. 또한 바울이 데려오라고 한 사람이 있습니다. 11절b은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올 때 마가를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사실 마가는 바울에게 있어 좋지 않은 기억과 관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바울의 1차 전도에 참여했다가 중간에 포기했었습니다. 이에 2차 전도를 준비하면서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로 바나바와 심하게 갈등하고 헤어지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무익한 자였으며 아픈 기억을 주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제 마가는 바울의 사역에 유익한 사람이었으며 보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고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항상 좋은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때로는 실망하고 관계가 원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 데 유익이 아니라 무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그런 관계로 마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와 복음을 위해 함께 헌신하다 갈등과 실망으로 끝내고 관계를 단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기도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노년의 바울은 많이 힘들고 외롭고 쇠약한 가운데 추위에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디모데와 마가를 빨리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들을 자신의 곁에 두고 함께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디모데와 마가와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 힘들고 외롭고 고통스러울 때 와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디모데와 마가처럼 함께 하고 싶은 사람, 사역에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더 많이 올 뿐만 아니라 데려올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들과 교회와 복음을 위해 함께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떠난 사람입니다. 10절a은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라고 합니다. 바울과 함께 있다 떠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데마는 왜 바울을 떠났습니까? 전에 데마는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믿음과 헌신에 변질이 있었습니다. 이에 그는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바울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떠난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2장 15절과 16절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고 합니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디모데후서 3장 2절과 5절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라고 합니다. 바울은 말세에 사랑의 왜곡과 변질의 현상이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경건하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육체의 정욕, 즉 쾌락을 사랑하고, 안목의 정욕, 즉 돈을 사랑하고, 이생의 자랑, 즉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가치와 사랑 지향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사랑하고, 더 사랑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누구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교회를 세우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셋째, 보낸 사람입니다. 10절b과 12절은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라고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난 사람은 데마였습니다. 반면에 바울이 떠나보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보냈습니다. 그레스게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만난 믿음의 동역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갈라디아로 떠났습니다. 특히 디도는 이방인이었는데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바울이 사랑하고 아끼는 동료요 동역자요 참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바울을 떠나 달마디아로 떠나갔습니다. 또한 바울은 두기고를 에베소로 보냈습니다. 에베소서 6장 21절은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정을 에베소교회에 알리기 위해 두기고를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바울의 사랑을 받는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복음 안에서 바울을 만나 친밀한 영적 관계를 갖고 복음과 교회를 위해 함께 수고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말년의 바울에게 있어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욕심과 필요를 위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필요를 위해 떠나보냈습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하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떠나보냈습니다. 건강한 교회, 성숙한 성도는 구심력과 원심력의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함께 모여 영적 교제를 나누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런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넷째, 남은 사람입니다. 11절은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고 합니다. 바울의 곁을 떠난 사람도 있었으며 떠나보낸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편 바울의 곁에 남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 누가입니다. 골로새서 4장 14절은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고 합니다. 누가는 바울의 사랑을 받는 의사였습니다. 그는 건강하지 않은 바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머물며 건강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바울이 간질과 안질이라는 고질적인 병을 앓고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누가와 같은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연약함을 돌보며 섬기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힘들고 연약한 성도들과 교회와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오히려 그 연약함과 부족함을 위해 존재하고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누가와 같은 변하지 않은 충성과 헌신이 있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힘과 용기를 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다섯째, 대적한 사람입니다. 14절과 15절은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고 합니다.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였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9절과 20절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 합니다. 그는 후메내오와 함께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해 파선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교회에서 출교함으로 더 이상 하나님을 모독할 수 없게 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우상 아데미 신의 형상을 구리로 만들어 돈을 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언제 어떻게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복음과 교회 사역에 많은 해를 입히고 대적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그를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종종 우리에게 있는 착각과 오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우리를 좋아하고 우리가 하는 일을 지지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이 그런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싸울 것이 아니라 그가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에 맡겨야 합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우리가 개인적으로 보복하고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선으로,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악으로 갚아 주시는 분입니다. 이에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인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곁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바울이 보고 싶어 하며 오기를 원하고 함께 하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며 바울을 버리고 떠난 사람도 있으며 악한 마음을 갖고 대적한 사람도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떠나보낸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오는 사람, 보낸 사람, 남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합니까? 떠난 사람, 대적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만남과 관계가 있었으면 합니다. 이를 위해 복음과 교회를 위해 끝까지 함께 수고하고 헌신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