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시편 71:19-21 혹시 ‘무텅이’ 란 단어를 들어보셨습니까? 그 단어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며, 종종 집단상담을 할 때 닉네임으로 사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텅이는 ‘거친 땅을 일구어 곡식을 심음’ 이라는 뜻이 있는 우리말입니다. 이 단어를 좋아하게 된 것은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기 시작한 때부터입니다. 아버님은 무텅이로 일생을 보내셨습니다. 저는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을 했습니다. 우리 집은 산과 밭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버님이 뒷산을 개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지만 소나무와 잡초가 무성했던 뒷산이 밭으로 변했으며 얼마 후에는 사과 과수원으로 변했습니다. 청소년기에 아버님이 돌아가셨기에 때로는 방황하며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고 난 후에 무텅이의 삶을 사셨던 아버님의 은혜는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는 것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철이 든다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알고 감사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도 철이 들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깨닫고 감사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신앙의 철이 든 사람, 성숙한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는 다윗입니다. 본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 의해 일시적으로 왕위에서 떠나게 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배반하고 죽이려고 할 때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어려움을 잘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에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고통과 위기를 잘 견디고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어떠한 분으로 믿었습니까? 그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과 무엇을 비교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절한 비교는 자기 성장에 많은 유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이나 부족을 발견하고 더 노력하고 집중할 수 있으며, 겸손한 태도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비교는 자기 성장에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때로는 비교 의식이 열등감을 만들고, 그 열등감이 자신에 대해 절망하거나 다른 사람을 향해 공격적인 태도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비교할 수도 없으며 비교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다른 것, 또는 다른 신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비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19절은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큰일을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다윗을 많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다윗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고백합니까? 시편 103편 8절과 9절은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가 풍성하신 분입니다. 자주 진노하지 않으시며 인자가 풍부하신 분입니다. 자주 경책하지 않으시며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망하지 않는 것은 거룩하고 완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비교할 수 없는 역사이며 축복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은 어떠하십니까?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지만 버리지 않으십니다. 아버지 다윗을 배반하고 왕이 되려고 한 압살롬은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다윗과 마아가 사이에서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입니다. 그는 매우 아름다운 남성으로 사람들이 크게 칭찬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는 완벽한 자였습니다. 특히 머리털은 아름답기에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은 친여동생인 다말을 욕보인 이복형 암논을 죽이고 어머니의 고향인 그술로 도망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군대 장관이었던 요압이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고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4년 동안 반란을 준비하여 아버지 다윗을 배반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 의해 쫓겨 다니던 피신 생활을 아들인 압살롬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은 그런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20절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라고 합니다. 첫째,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무엇 때문인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형제들 사이에 있었던 문제는 아버지 다윗이 율법을 어기고 이방 왕들처럼 여러 명의 여인을 아내로 취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둘째, 다윗은 그 일을 알고 크게 분노했으나 2년 동안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압살롬이 누이인 다말을 욕보인 형 암논을 살해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자신의 죄로 인한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징계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죄에 대한 징계를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징계로 인해 고난을 당했으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이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려 올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죄를 범하고 성공하는 것보다 실패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 성공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에서 8절은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때로는 징계하시지만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극심한 고통과 불행을 경험하게 하시지만 징계를 통해 우리를 온전하게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징계의 고난과 고통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징계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는 신호입니다. 죄로 인한 고난이나 고통으로 인해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을 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더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이전보다 더 좋게 하십니다. 다윗은 비록 아들에 의해 쫓겨 다니는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21절은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라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은 비록 고난과 고통을 겪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첫째,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을 더욱 창대하게 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위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진정한 위기는 환난이나 위험에 있지 않습니다. 위기를 만날 때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편 86편 7절은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사면이 모두 막혀 있는 것 같고, 그것을 뚫고 넘어갈 힘이 없을 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사방의 길은 막혔으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은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선한 인도를 믿었습니다. 다윗은 ‘나를 더욱 창대케 하시고’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깊은 곳’으로부터 구출될 뿐만 아니라 원래의 모습 그 이상으로 높아지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본문에서 ‘더욱 창대케’해 달라고 하는 것은 재산을 더 많게 해 달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존귀나 영예를 뜻하는 히브리어 ‘카보드’와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지위와 그에 따른 위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역대상 29장 28절은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으매 그의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보다 내일, 지금보다 나중을 더 좋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지금의 실패는 성공이 되고, 고난은 축복이 되고, 눈물은 웃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와 축복을 믿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위로를 소망했습니다. 다윗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그 누구도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그를 위로하지 않고, 오히려 자식을 잘못 키운 것을 지적하거나, 그가 당하는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위로를 믿었습니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멸시하지만 진정한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고, 나를 인정하지 않고, 나를 위로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고린도후서 1장 4절은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환난 중에 있는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자로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위로를 받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304장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입니다. 그 곡을 작사하고 작곡한 사람은 프레드릭 레만입니다. 그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의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생활비를 위해 공장이나 병원에서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즉 은혜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 은혜는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자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항상 감격하고 감사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