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가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마태복음 20:20-28 성탄절을 맞이하며 어떤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으면 좋을까? 하며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머리에 떠오른 것은 생일을 축하하면서 불렀던 노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생일에 부르는 축하 노래는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OOO의 생일 축하합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장난스럽게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그렇게 살 것을 왜 태어났니!’ 라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그 노래를 생각하며 생일 축하하는 노래로 정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면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과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존재 목적이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답해야 합니다. 그런 질문과 대답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성탄절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낼 수 있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라고 합니다. 어떤 한 사람이 나에게 온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가볍게 그 사람을 맞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환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오는 것을 엄청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환대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가볍게 여기며 무시하기도 합니다. 사람들과 만남과 이별은 너무 쉽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오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태도를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셨을까요? 이것은 성탄절을 맞이하며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성탄절을 맞이하며 이 질문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 질문을 던지지 않고 보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종종 예수님에 대한 깊은 묵상이 없는 성탄절을 보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낮고 처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통해 귀한 은혜를 경험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성탄절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가시면서 도중에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율법 학자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며, 그들은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다음 이방인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당할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 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20절과 21절은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라고 합니다.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절하고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하나는 예수님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는 예수님 다음가는 영광과 권세를 얻고 누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를 앞세워 요구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요구를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4절은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 청탁했다는 말을 들은 열 제자는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이는 그들도 역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야고보와 요한과 같이 영광과 권세를 얻고 누리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요구와 반응에 대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지배하고 고관들은 권력을 행사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높아지려면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며, 첫째가 되려면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의 권력자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인자는 구약 성경 시편 8편 4절과 다니엘서 7장 13절과 에스겔에 나타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81번 사용되었는데 주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키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인자의 일반적인 의미는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 예수님의 인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성육신, 고난, 죽음 등에 관련하여 사용된 명칭입니다. 인자는 예수님이 고난을 받는 종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섬김입니다. 28절 상반절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은 종으로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섬김은 헬라어 διακονέω(디아코네오)로 ‘봉사하다. 자신을 괴롭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는 온전한 섬김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섬기기 위해서는 자발적 고난과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 낮은 자리에서 더 궂은 일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본을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5절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비롯하여 자신을 팔고 배반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또한 베드로를 비롯하여 배반하고 떠난 제자들을 위해 디베랴 호숫가에서 친히 떡과 고기로 아침을 지어 먹이셨습니다. 종과 섬김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종은 섬김을 받은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살았습니까? 로마서 1장 1절과 2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고난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해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 고난받는 것을 영광과 축복으로 생각했습니다. 누가 섬길 수 있습니까? 종의 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누가 행복할까요? 섬김을 받는 사람일까요? 섬기는 사람일까요? 섬김을 받는 사람보다 섬기는 사람이 더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섬김을 받으려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로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본받는 삶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행복을 경험하는 삶입니다. 더 많은 섬김을 받으려는 자가 아니라 더 많이 섬기는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대속입니다. 28절 하반절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 합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최정점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것입니다. 대속물은 헬라어 λύτρον(뤼트론) 으로 ‘석방금, 속전’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노예 시장에서 값을 지불하고 사서 자유를 주는 것에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과 마귀의 노예가 되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대속에 관해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사야 53장 5절과 6절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찔림을 당하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다 길 잃은 양처럼 제각기 잘못된 길로 갔으나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고난과 고통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흠과 티가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 죄 사함이 있는 곳에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중풍병에 걸렸던 자가 죄 사함을 받고 일어나 걸었습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던 여인은 죄 사함을 받고 평안과 구원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았던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고 말씀과 기도와 사랑의 교제를 통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교회의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가 있었기에 구원과 평안과 교회와 부흥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받은 자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에베소서 5장 2절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것은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대속물이 되신 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가장 소중한 생명을 주신 희생이었습니다. 우리가 대속의 은혜를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희생은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에게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들의 필요를 위해 우리의 필요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대속물이 되셨을 때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희생할 때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 희생이 나도 살고 다른 사람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살 수 있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에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성탄은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도 그 사건의 의미와 가치를 모르고 성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성탄절 예배를 드리고 행사를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이 있었기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의 은혜를 받은 자로 우리도 섬기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희생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겸손한 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며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의 은혜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겸손의 섬김과 사랑의 희생을 통해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