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6) : 시기와 경쟁은 육신에 속한 일이다 창세기 30:1-13 바울은 영적인 관점에서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고린도전서 2장 14절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과 물로 거듭나지 않은 불신앙의 사람,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고린도전서 3장 1절은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라고 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영적인 어린아이입니다. 그들은 육신의 정욕을 따라 육신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로마서 8장 5절과 6절은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성령을 따라 영의 일을 합니다. 영의 생각인 생명과 평안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령한 자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혹시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기에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육신에 속한 자가 되면 자신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또한 가족이나 직장이나 교회를 비롯한 공동체를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행복과 평안이 아니라 불행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야곱의 가정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칠 년을 며칠처럼 일했습니다. 그런데 라반이 야곱을 속이고 레아를 먼저 아내로 삼게 했습니다. 야곱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십사 년을 일했습니다. 레아는 야곱의 아내로 살고 있었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사랑이 동생 라헬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레아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29장 31절은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레아의 태를 열어 자녀를 낳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레아는 아들을 낳을 때마다 남편의 사랑과 연합을 생각했습니다. 이는 레아가 얼마나 남편 야곱의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로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라헬은 레아가 아들을 낳고 야곱의 관심과 사랑이 언니에게 갈수록 불안했습니다. 이에 라헬은 어떻게 했습니까? 첫째, 시기와 원망을 했습니다. 1절과 2절은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라고 합니다. 라헬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하자 언니 레아를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야곱을 향해 자신이 아들을 낳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겠다고 위협과 원망을 했습니다. 야곱은 라헬이 임신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야곱은 임신을 시키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향해 화를 내었습니다. 둘째, 경쟁적으로 자녀를 낳았습니다. 3절은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라고 합니다. 라헬은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여종 빌하를 통해 아들을 얻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들여보내 단과 납달리를 낳았습니다. 라헬이 여종 빌하를 통해 아들을 낳은 것은 언니를 시기했기 때문이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레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9절은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라고 합니다. 레아는 동생 라헬과 경쟁에서 지기 싫었습니다. 이에 여종 실바를 통해 갓과 아셀을 낳았습니다. 레아는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에게서 잇사갈과 스불론을 낳았습니다. 후에 디나라는 딸을 얻었습니다. 이로써 레아는 동생 라헬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라헬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23절과 24절은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라헬을 생각하시고 소원을 들으시고 요셉을 주셨습니다. 또한 야곱이 고향으로 가던 길에 베냐민을 낳았습니다. 야곱은 라헬과 레아와 빌하와 실라에게서 열두 명의 아들을 얻었습니다. 후에 이들은 서로 갈등하고 반목했습니다. 우리는 야곱이 아들을 낳는 것을 통해 육신에 속한 자와 육신의 일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육신의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시기입니다. 1절은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고 합니다. 라헬은 자신은 아들을 낳지 못하는 데 언니 레아가 아들을 낳은 것을 보고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시기는 קָנָא(카나)로 ‘질투하다, 열심하다’ 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얻으려는 잘못된 열심입니다. 이는 집착에 대한 강력한 질투심에서 나옵니다. 라헬과 레아에게 있던 시기는 누구에게도 있었습니까? 사도행전 7장 9절은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라고 합니다. 레아의 아들이었던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았습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인한 것입니다. 요셉을 시기했기 때문입니다. 형제들 사이에서 일어난 시기는 야곱의 가정에서만 있을까요? 현대의 가정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만 시기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시기가 있는 곳에 혼란과 악한 일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갈등과 분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기는 뼈를 썩게 만듭니다. 이는 자신의 건강도 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기는 가정과 교회를 비롯한 모든 공동체와 개인적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과 공동체를 흔들고 무너지게 만드는 악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베드로전서 2장 1절과 2절은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 즉 영적인 어린아이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은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육신의 일이기에 버리고 순전한 신령한 젖, 즉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육신 속한 자가 영에 속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육신에 속한 시기가 없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영에 속한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개인만 아니라 가정과 교회와 직장을 비롯한 공동체를 온전히 세울 수 있었으면 합니다. 자신에게 없는 것과 이루지 못한 것으로 인한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얻고 이룬 사람들을 축하하며 축복할 수 있는 믿음의 성숙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경쟁입니다. 8절은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고 합니다. 경쟁은 פָּתַל(파탈)로 ‘비틀다, 뒤틀리다’의 뜻이 있습니다. 또한 ‘씨름, 싸움’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라헬과 레아는 머리를 잡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뒤틀린 마음을 가지고 치밀하고 악한 싸움을 했습니다. 야곱도 육신에 속한 자로 태에서부터 경쟁했으며, 성장하여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습니다. 야곱은 어떤 씨름을 했습니까? 창세기 32장 28절은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고 합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했습니다. 그 씨름에서 야곱은 이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과 씨름을 한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 혹은 싸움에서 질 수 있을까요? 야곱이 이길 수 있는 씨름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야곱보다 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야곱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남편이나 아내 중에 힘이 센 사람이 아닙니다. 말을 더 논리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이깁니다. 반면에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집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기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기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고 이기려 합니다. 하지만 영에 속한 사람은 경쟁하려고도 이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사랑은 영에 속한 사람인지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 라헬와 레아에게서 발견하는 결정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레아와 라헬은 아들을 낳으면 하나님이 돌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상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후한 선물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했지만 전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3절은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내가 중심이며, 사람이 중심입니다. 그래서 시기와 분쟁을 일으킵니다.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영에 속한 사람은 말과 삶이 일치합니다. 신앙과 생활이 일치합니다. 그들은 신앙의 고백이 삶의 고백을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의 성공과 형통을 축하하고 축복하는 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교회를 하나 되게 하며 세우는 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계속해서 영에 속한 자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에서 벗어나 영에 속한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