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여인의 만남과 구원
요한복음 4:39-42
예수님께서 주로 사역하신 지역은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예수님은 갈릴리와 유대를 오르내리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면서 사마리아에 들어가시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들어가셔서 수가성에 있는 우물 곁에서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도에 대한 것과 예배에 대한 것에 대한 것입니다. 에수님은 여인에게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예배가 아니라 전도에 대한 것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를 통해 전도에 관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첫째로, 전도의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들어가셔서 수가 성에 있는 야곱의 우물 곁에 피곤하여 앉아 계셨습니다. 그때는 제 육시로 우리의 시간으로는 햇볕이 뜨거운 12시 즉 정오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예수이는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을 때 매우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도 하지 않았으며, 특히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여자는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17절과 18절은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으며,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여자에게 지금까지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사람도 여자의 남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와 많은 대화를 하셨으며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남편 여섯이 있는 여자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면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일지라도 전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다양한 주장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음란한 생활을 하는 여자입니다.
여자는 예수님께 남편이 없다고 속였습니다. 또한 다섯 명의 남자와 살다 헤어지고,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지만, 실상은 합법적인 부부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물을 먹어도 또 다시 목이 마르는 것처럼 한 남자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음란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 여자는 육체의 정욕을 따라 음란과 정욕과 탐심을 가지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여자는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비난과 정죄의 대상이었습니다. 어쩌면 마을 사람들은 여자를 비난하고 저주했기에 햇볕이 뜨거워 물을 길으러 오지 않는 시간에 우물을 찾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여자를 찾아가셨으며 만나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과 정죄와 저주를 받는 사람이기에 더 복음을 들어야 했습니다.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 생활을 버리고 거룩하게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남자에게 버림을 받은 가련한 여자입니다.
그 당시에는 남편이 아내를 버릴 수는 있어도 아내가 남편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여자는 다섯 명의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은 가련하고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남자에게 상처를 받고 비참하게 사는 여자였습니다. 어쩌면 여섯 번째 남편에게도 버림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매일 매일 불안하게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여자 혼자서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없기에 남자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은 그런 여자의 상처와 아픔을 만져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남자에게 버림을 받는 여자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긍휼한 마음으로 따뜻한 말도 건네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조롱하고 멸시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를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멀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걸어 주셨습니다. 친절하게 여자의 질문에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처와 고통을 치유 받고 복음 안에서 자유를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여자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음란한 생활을 하고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정죄를 받고 있어도, 버림을 받고 상처와 고통 가운데 살고 있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구원을 받지 않아야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복음을 듣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복음을 들어야 하며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복음을 전하고 들을 사람을 스스로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복음을 전하기 주저하며 시도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악한 사람으로 비난을 받는 사람도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깊은 상처와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도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주위를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이 보일 것입니다. 그때 인간적인 편견을 버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전도의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를 하며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은 탁월한 전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때로는 낯선 사람만 아니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하셨습니까?
첫째, 필요 공감입니다.
6절과 7절은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야곱의 우물 곁에 앉아 계신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여자가 뜨거운 한낮에 우물에 온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모두 마실 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동감은 ‘어떤 의견이나 생각에 한가지로 똑같이 느낌’을 말합니다. 예수님과 여자에게는 같은 느낌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목마름이었으며 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필요에 대한 반응입니다. 일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반응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결과도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도 대상자의 필요를 동감하고 공감해 줄 수 있으면 다릅니다. 현대 전도에서 요구되는 것이 필요 중심적 전도입니다. 불신자들의 의문에 답해주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염려하고 걱정하며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묻고 듣고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으로 돌보며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끼며 채워주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대화 전환입니다.
10절과 11절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라고 합니다. 전환은 ‘다른 방향이나 다른 상태로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기갈을 해갈해 줄 수 있는 물에서 영적 의미를 가진 생수로 대화를 전환하셨습니다. 그물을 사람이 길어 마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와 착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해 관심이 없으며, 복음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이야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즉 온전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 인한 것입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며 덕이 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입니다. 복전도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메시지만 아니라 메신저, 즉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교회성장연구소의 통계에 의하면 95%가 관계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종하지 않는 데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의 행적을 아는 탁월한 통찰력도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사람과 신뢰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그 관계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영적인 관계로 전환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복음을 전하는 대화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런 관계와 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복음 제시입니다.
13절과 14절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합니다. 제시는 ‘글이나 말로 어떤 의사나 근거를 드러내 보이거나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에 관해 말씀하자 여자는 그 생수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배에 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25절과 26절은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오시면 알려 달라는 요청을 받으시고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그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직접 자신이 그리스도, 즉 구원자라는 것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들어가신 것은 여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여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여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28절과 29절은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여자는 그리스도, 즉 구원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물동이도 버리고 동네에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자는 단지 사랑이 많은 유대인으로만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데 구원이 있습니다.
여자가 동네에 들어가 예수님을 전하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41절과 42절은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고 합니다. 여자는 동네에 들어가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여자의 말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더 많은 사람이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바로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복음을 전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들을 찾아가 만나셨으면 합니다. 그들의 필요에 공감하며 아픔과 상처를 만져주며 기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인간적인 대화와 관계를 넘어 영적인 대화와 관계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정중하고 지혜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 일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고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