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유익입니다 베드로전서 4:1-6 예화) 끓는 물속에서 결혼을 한지 18년째 된 한 여인의 얼굴은 어두움이 가득했습니다. 남편은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가 나고 도망 중에 있습니다. 채권자들은 찾아와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 닦달을 했으며, 법원에서는 얼마 있지 않으면 집행을 할 수밖에 없다는 통고를 했습니다. 아이들은 창피해서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하면서 방안에만 있었습니다. 여인은 숨이 막힐 것 같은 상황에서 친정어머니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하루는 그냥 집을 나와 친정으로 향했습니다. 친정어미를 만나자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다고’ 하소연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친정어머니는 가만히 딸을 바라보더니 부엌에 들어가 냄비 세 개에 물을 채웠습니다. 첫째 냄비에는 당근을, 둘째 냄비에는 달걀을, 넷째 냄비에는 커피를 넣고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불을 끄고 냄비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물에 넣고 끓였더니 당근과 달걀과 커피는 어떻게 변했냐고 했습니다. 단단하면 당근은 약해졌습니다. 달걀의 껍데기는 단단해졌습니다. 커피는 물을 커피색과 향기로 변화시켰습니다. 친정은 사랑하는 딸을 향해 고난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셨습니다. “끓는 물에 들어가는 것은 당금과 달걀과 커피에게는 고난일 수 있다. 그 고난에 대해 반응하는 것은 모두 달랐다. 당근은 단단했지만 물러졌고, 달걀은 약했지만 강해졌고, 커피는 오히려 물을 변화시켰다. 힘드니! 고통스럽니! 그런데 너는 지금 당근과 달걀과 커피 중에 어떤 것이니!” 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고난을 당하면 힘없이 허물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더 단단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자신도 변하고 환경도 변화시키고 있습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고난 속에서 달걀처럼 단단해 지고, 커피처럼 변화가 일어나는 은혜를 주시기 원합니다. 그런 거룩한 소망과 기대를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고난은 유익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아니 거짓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말장난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문을 통해 고난이 유익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유익이다’ 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으면 고난이 유익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누구를 위한 고난이 있습니까? 첫째, 자신을 위한 고난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을 위한 고난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위한 고난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고난은 그래도 잘 견딜 수 있습니다. 또한 타인을 위한 고난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것이라면 그래도 잘 견딜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고난이 아닌 것을 당하는 것은 손해를 보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한 고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복음을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위한 고난은 당연한 것이며, 다른 사람을 위한 고난은 사랑이며, 하나님을 위한 고난은 사명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죄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 고난에 대해 묵상하는데 있어 핵심은 예수님의 고난에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사야 53장 3절에서 5절은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으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맞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창에 찔리셨습니다. 사람에게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상처를 치유 받게 되었습니다. 죄악을 용서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성도들의 태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합니까? 1절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육체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아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처럼 고난 받을 것을 마음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회와 복음을 위한 고난을 외면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불평과 원망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더운 곳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힘들게 청소를 하고, 주일에 일찍 나와 헌신해야 하는가?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도 못하고, 좋은 않은 말을 들으면 섬겨야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그 고난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인정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이 주는 유익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첫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합니다. 2절은‘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고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구원 받은 성도들은 육신으로 살아갈 때 더 이상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게 됩니다.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3절은‘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구원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심을 통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사망에서 생명을 얻은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자가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의 의미와 은혜를 알기에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하게 살아야 하는 줄 믿습니다. 둘째, 세상 사람들의 비방을 받습니다. 4절과 5절은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고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 사람의 정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어떤 일이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방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과 함께 극한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살게 되면 세상 친구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비방을 합니다. 하지만 그 비방을 정말 미워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부러움에 대한 성숙하지 못한 반응일 수 있습니다. 3장 16절은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고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구원 받고 변화 받은 성도들은 선한 양심을 갖고 살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선을 행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선행으로 인해 비방하던 사람들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감동입니다. 그 감동은 비방과 고난을 받지만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데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지만 선을 행함으로 그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구원 받은 성도들의 삶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6절은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고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복음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으로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이 고난입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배척과 멸시를 받으신 것이 고난입니다. 악한 자들에 의해 채찍에 맞으신 것이 고난입니다. 손과 발에 못 박히고 창에 허를 찔리신 것이 고난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조롱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이 고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이 있었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선포한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죽음이 구원을 위한 것임을 믿은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2절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고 합니다. 바울은 고난과 능욕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복음 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받으시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고난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 고난은 죄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와 복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정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지만 감동과 변화를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께는 영광이며 사람들에게는 유익이며 우리에게는 축복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고난을 통해 많은 유익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과 성도들과 복음과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고난을 은혜로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