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축복입니다 베드로전서 3:13-22 예화) 고난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의 뜻 찾았습니다(국민일보 2018. 07. 14) 4년째 ‘필라델피아 양성 성인 급성 림프성 백혈병’으로 투병 중인 원성도(69) 불가리아 선교사와 아내 김수자선교사입니다. 원선교사는 10년 동안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불가리아에서 헌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백혈병으로 투병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헌신을 하고 있는 고난이 온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원선교사 부부는 모든 길을 아시는 하나님께 모든 환경을 믿고 맡기고, 백형병과 고통, 사망에 대한 굴레에서도 자유하게 되고 기뻐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원 선교사는 백혈병 발병 이후 한 번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그 동안 병원에서 환우 등 30명 이상 전도한 것은 선교사 부부의 소중한 열매입니다. 원 선교사가 믿음으로 병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며 많은 환우들이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원선교사에게 있어 백혈병은 인간적으로는 고난과 고통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고난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편지를 쓰고 있을 당시는 로마의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짐승의 밥이 되었으며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지고, 불에 타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 시기에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없이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과 환경에서 베드로는 고난에 대해 교훈과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교훈하고 권면하는 고난은 무엇입니까? 첫째, 선을 행하면 고난을 당하지 않습니다. 13절은‘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먼저 일반적인 관점에서 고난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 그것은 열심히 선을 행하면 그 누구에게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악으로 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양문 곁에 있던 베데스다 연못 주위에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연못의 물이 요동을 할 때 들어가면 병이 나을 수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를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를 성전에서 다시 만나셨을 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요한복음 5장 14절은‘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이는 그가 병이 든 것은 죄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죄를 범하며 병이 들 수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더 심한 병에 걸리지 않게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한 여인이 사람들에 끌려 예수님께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돌로 치려는 사람들을 돌려보낸 후에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요한복음 8장 11절은‘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수치를 당하고 돌에 맞아 죽지 않기 위해 다시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선이 아닌 악을 행하면, 죄를 지으면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수치를 당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당하지 않기 위해 악을 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선을 행해야 합니다. 혹시 고난 중에 있습니까? 그것이 악을 행함으로 인한 것은 아닙니까?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지혜이며 신앙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때로는 의를 행함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무엇을 말합니까? 둘째, 의를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일반적인 이야기로 선을 행하면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 아닐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선을 행할지라도 즉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14절은‘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라고 합니다. 의를 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바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경외하는 것과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를 행하는 것은 경외와 경건의 삶입니다. 우리는 의를 행함으로 고난 받은 사람 요셉을 발견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하게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으며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이에 보디발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는 가정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런 요셉을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39장 9절은‘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라고 합니다. 요셉은 여인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보디발이 자신에게 맡긴 것은 소유이지 아내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인과 동침하는 것은 보디발에게 큰 악을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로운 행위, 즉 경외와 경건으로 인해 옥에 갇히는 고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의를 행함으로 받는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낙심하고 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경건하게 사는 삶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난의 밤이 깊어질수록 더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요셉과 같은 경외와 경건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의를 행함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의를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고난입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은‘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믿고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고난은 함께 있는 쌍둥이와 같습니다. 둘째로, 교회를 위해 당하는 고난입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받은 괴로움을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을 소원했습니다. 셋째로, 복음을 위해 당하는 고난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8절은‘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증언하다가 옥에 갇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것을 권면했습니다. 복음은 고난 중에 꽃을 피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순교자의 피를 통해 열매를 맺었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당하는 고난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 즉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방식대로, 가치관대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경건하게 살기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이기에 기쁨인 줄 믿습니다. 베드로는 의를 위해 고난을 당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결코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14절은‘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라고 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두려움과 근심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고난으로 인해 두려움과 근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를 행함으로 고난 받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귀는 의인의 기도에 열려 있습니다. 둘째,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15절은‘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낙심하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마음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은 부활과 천국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도 고난을 받을 때 영원한 생명과 천국에 대한 소망이 충만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셋째, 선한 양심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16절은‘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며 악한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항상 선한 양심,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욕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할 수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고난에 대한 신앙적인 태도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해야 합니다. 18절은‘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의를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셨습니다.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자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의를 행함으로 받은 고난을 통해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저술가 C.S.루이스는 “평안할 때 인간은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 속삭이시는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보내시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고난은 잠든 우리의 신앙과 양심을 깨우는 하나님의 천둥소리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고난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고난은 비그리스도인이거나 그리스도인이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죄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의를 행함으로 이한 것이든 같은 것입니다. 고난을 받으려면 악을 행함이 아니라 의를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교회를 위해, 복음을 위해, 경건하게 살기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 고난을 당할 때 낙심하고 근심하지 말고, 부활과 천국의 소망을 갖고, 선한 양심을 품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의를 행함으로 받는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이 축복이라는 것을 간증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