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고난, 그리스도의 고난 베드로전서 2:13-25 예화) 장명희의 무릎 꿇은 나무 중에서 캐나다 로키 산맥 고지대에 ‘무릎 끓은 나무’ 라고 불리는 나무가 있습니다. 3,000미터 수목 한계선에서 강한 바람과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무릎을 꿇은 모습을 하고 자란다고 해서 부르는 나무입니다. 주변의 환경이 너무 가혹하기 때문에 나무들은 생존을 위해 무릎을 꿇고 사는 삶을 배운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나무가 명품 바이올린을 만드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재료가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수많은 시련을 이겨내며 거칠어진 껍질 속으로 다져지고 다져진 나이테가 만들어내는 깊고 고운 공명의 소리로 수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하는 명품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매서운 바람과 눈보다 속에서 나름대로 거기에 순응하는 법으로 배우며 제각기 삶을 연주하고 있는 건지 모릅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좌절하고 낙심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인행이 끝납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세로 무릎 꿇은 사람은 명품 인생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는 사람은 아무런 고난 없이 좋은 조건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온 사람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고난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 고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드러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고난에 대한 태도입니다. 고난을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느냐?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난에 대해 두 가지 관점에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매우 밀접하게 연결시키면서 고난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고난에 대해 함께 말씀을 나누며 은혜를 경험했으면 합니다. 고난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고난을 통해 명품 인생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고난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 주변에 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악을 행하고 있다고 비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착한 행실을 통해 불신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고난을 잘 견디며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에 대한 태도를 보며 감동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고난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에는 악을 행함으로 받은 고난과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죄가 있어 매를 맞는 것, 즉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받은 고난을 가볍게 여기거나 억울해 하거나 절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5절은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회개하고 회복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입니다. 인간이 만든 제도로 인해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악한 위정자들을 통해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악한 주인들로 인해 직장에서 억울하게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너그러운 주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제도와 직장과 사람들로 인해 부당한 고난을 받을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때로는 부당한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 고난을 받을 때 신앙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19절과 20절은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합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억울하게 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없이 참는다면 하나님은 그런 그리스도인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고 고난을 받을 때 인내할 수 있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악을 행함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을 때 우리 자신을 생각하면 억울하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분노하고 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면 슬픔을 참을 수 있습니다. 혹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 고난이 억울하고 부당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고난을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고난을 주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역사하실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때로는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부당하게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직장의 상사나 동료로부터,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교회 지도자나 성도로부터 억울하게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인간적인 생각과 감정으로 반응하지 않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슬픔을 참고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위대한 역사를 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시고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만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은 무엇이었습니까? 22절은‘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죄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거짓말을 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 고난은 부당한 고난이었습니다. 억울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런 고난에 대해 그리스도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해 유대 장로들과 로마 군병들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유다가 예수님께 입을 맞춤으로 신호를 하자 로마 군병이 예수님을 잡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칼로 쳐 떨어 드렸습니다. 그것을 보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칼을 칼집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6장 53절은‘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한 군단은 보병 6,000명과 말 700여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열두 군단, 즉 보병 72,000명과 말 8,400필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을 대적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을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 안에서 받아 들이셨습니다. 그 현장에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어떻게 하셨다고 합니까? 23절은‘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악한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시면서 맞서서 욕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당한 고난을 당하시면서 위협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공의로우신 심판장이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억울하게 고난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과 44절은‘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로마서 12장 14절은‘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바울은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라고 합니다.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억울하게 고난을 주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부당한 고난을 당할 때 반응하는 신앙적인 태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바울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난에 대해 신앙적인 성숙한 반응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24절과 25절은‘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고난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입으심으로써 우리가 낫게 되었습니다. 길을 잃은 양과 같이 잘못된 길로 갔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통해 영혼을 살피시는 목자와 보호자의 품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슬픔을 참고 인내하며 견디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적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속된 말로 병신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고난을 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스스로 원수를 갚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억울해도, 부당해도 고난을 당하는 것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죄악에서 건지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죄를 깨닫기 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에 대한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 발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고난을 통해 이루신 구원 역사를 생각하며, 우리도 고난을 인내하며 견딜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고난이 영광이며 축복이며 능력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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