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증거하는 삶(1) 고린도전서 9:16-17 우리가 교회에서 말씀을 듣거나 행사를 하는데 있어 가장 부담스러운 것 중에 하나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느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해야 하고 들어야 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없이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VIP 즉, 전도대상자를 작정하고 기도하며 특별한 관심과 사랑과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만남과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함이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까? 아니면 냉랭한 마음과 관심만 있지는 않습니까? 왜 복음을 전하는 일에 관심이 생기지 않을까요?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하지 못할까요? 이런 안타까움과 마음을 갖고 복음 증거의 삶에 대해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첫째, 복음의 은혜를 알고 감격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에 많은 남자와 살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영원한 생수이며 생명의 떡이라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이에 어떻게 했습니까? 요한복음 4장 28절에서 30절은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고 합니다. 여인은 복음을 듣고 자신이 왜 우물로 나왔는지도 잊어 버렸습니다. 물동이를 버리고 동네로 뛰어갔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육체의 목을 시원하게 하는 물을 얻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많은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남자를 찾아 살아야 했던 기구한 인생을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복음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물동이를 버리고 동네에 들어가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어떤 있었습니까? 요한복음 4장 29절과 30절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고 합니다. 여인과 한 동네에 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맛있는 식사를 했던 식당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과 다시 찾아가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그 식당을 자랑하며 소개하기도 합니다. 복음의 은혜는 맛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한 끼 한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은혜를 알았기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복음을 위해 모든 인생을 보냈습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복음의 은혜의 풍성함과 충만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거룩한 열정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복음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긍휼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명의 제자를 짝을 지어 보내시면서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나가서 귀신을 쫓아내었으며 수많은 환자들을 고쳤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오는 사람들을 보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마가복음 6장 34절은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긍휼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긍휼의 마음을 주님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허기진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또한 육체의 허기진 사람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한 영혼에 대한 거룩한 안타까움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영혼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는 것에 대한 영적인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9장 1절과 3절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 합니다. 바울에게는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울의 형제, 즉 골육과 친척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을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도 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126편 5절과 6절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구원 받지 않은 영혼에 대한 거룩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을 향한 영적인 아픔과 고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믿지 않은 사랑하는 부모를 위해, 자녀를 위해, 가족을 위해, 친구를 위해, 이웃을 위해 긍휼의 마음을 갖고 울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 구원의 역사로 인해 다시 우는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셋째, 복음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겨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행동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는 필요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다음은 사명 때문입니다. 현재는 필요하지 않지만 사명이 있으면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필요와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악한 마귀의 종으로 살고 있는 자를 자유하게 하는 것은 복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사망과 지옥의 형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복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7절은‘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그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에 스스로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그에게 예루살렘에서 당할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가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도행전 20장 24절은‘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바울은 복음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희생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사명입니다. 바울에게만 복음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복음 증거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명에 순종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그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아는 자를 통해 일하십니다. 복음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는 것을 알고 헌신하고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넷째, 성령의 충만함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과 지혜와 경험과 능력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 생각과 마음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종종 복음을 전하다 낙심하고 포기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성령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할 마음도 생기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한 능력도 없습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성령 충만 하면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계셨기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1장 8절은‘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이 권능을 받을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오하 땅 끝까지 가서 증인이 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의 임재와 충만을 주신 것은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순절 날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재와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사도행전 2장 11절은‘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성령 충만하여 다른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은 말했습니다.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입니다. 즉 복음을 통해 일어난 구원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예루살렘 거리로 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죄는 용서받을 것이며,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사도행전 2장 41절은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고 합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찢고 회개하고 예수를 그리스도 믿었습니다. 그 날에 복음을 듣고 구원은 사람들의 수는 삼천 명이 넘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구원 역사를 전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복음을 전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는 부흥을 했습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복음을 듣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던 것도,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한 것도 모두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전하시기 원하십니까? 교회의 부흥을 경험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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