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을 알면 섬기게 된다 마가복음 10:41-45 예화) 치맛바람 본래 치맛바람은 여성의 어떤 극성스러운 사회적 활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람직하지 못한 여성들의 극성맞은 행위를 지적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치맛바람의 유형을 크게 분류해보면 대개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교육 분야로 초·중·고등학교 등 교육에 있어 극성스런 어머니의 활동입니다. 둘째, 경제 분야로 계모임을 비롯하여 각종 투기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셋째, 향락 분야로 춤이나 도박이나 쇼핑 등과 같은 향락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런 치맛바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사건은 무엇입니까? 야보고와 요한의 어머니의 치맛바람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당할 일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는 배반당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들은 인자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줄 것이고 이방 사람들은 인자를 조롱하고 침을 뱉고 채찍으로 때린 뒤 죽일 것이다. 그러나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야고보와 요한과 어머니 살로메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과 어머니가 예수께 다가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주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 중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고 계셨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다른 제자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을 청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청탁을 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생각할 때 그들은 출세를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실상이었습니다. 과연 이것이 그들에게만 있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니 때로는 우리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하여 돈을 벌고, 출세를 하고, 성공을 하려는 사람들은 그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성공과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자로서의 감사와 감격으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41절은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0장 24절에서는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그들의 대화를 들은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었습니다. 그들은 분노했습니다. 제자들의 분노는 단순히 화를 내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화는 아가나크테오로 ‘분개하다, 격분하다’ 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매우 분노하고 마음이 언짢았습니다. 왜 제자들이 화를 내고 분노했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개인적으로 청탁을 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이유는 제자들도 그들과 같이 예수님의 좌편이나 우편에 앉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출세와 권세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이 먼저 선수를 친 것입니다. 사실 그들과 제자들이 별로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겉으로 표현했을 뿐이며, 제자들은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예화) 드러나 죄인, 숨은 죄인 어느 목사님이 교도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면서 유난히 눈에 띠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죄를 지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얼굴이 너무 선하게 생겼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은 그 죄수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죄가 드러난 죄인이냐? 죄가 드러나지 않은 죄인이냐? 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도 죄인입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모두 죄인일 뿐입니다. 그것을 알면 그렇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분노할 일도 별로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위에서 우리 자신의 행위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이 화를 내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첫째, 제자들을 교훈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을 향해 화를 내는 제자들을 모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가져야 할 리더십에 대해 교훈하셨습니다. 세상 리더들은 어떻게 합니까? 42절과 43절은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라고 합니다. 그들은 임의로 주관을 합니다. 권세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하며, 권세를 남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특권을 갖고 있다고 여기면서 사람들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43절과 44절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세상 통치자들과 같지 않을 말씀하셨습니다. 높아지기를 원하면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섬김의 리더십, 종의 리더십을 요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철저하게 종으로 섬겨야 했습니다. 43절의 ‘섬기는 자’ 는 ‘디아코노’ 로 ‘하인’을, 또한 44절의 ‘종’ 은 ‘둘로스’ 로 ‘노예’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섬기는 자와 종이 되라고 하신 것은 같은 의미를 반복해서 강조하신 것입니다. 즉 종으로서 섬기는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특히 ‘디아코노’ 는 성경에서 ‘집사’ 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집사는 어떤 직분입니까? 종의 의식을 갖고 섬기는 자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집사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직분은 종으로 섬기는 사역입니다. 예화) 종 된 증거 제자훈련을 받는 중에 한 성도가 인도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종이 되라고 하셨는데, 내가 종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자 인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형제를 종으로 대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을 때입니다 세상에서는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섬기며,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섬기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섬기는 것을 때로는 연약하고 부끄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서로 섬기는 자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섬김은 최고의 사랑이며 겸손입니다. 우리는 직분을 권력으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권세를 부리지 않아야 합니다. 직분이 권력이 되면 종으로 섬기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대하게 될 뿐만 아니라 겸손히 헌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섬기는 자입니다. 우리는 종입니다. 그러므로 더 낮은 자리에서, 더 험한 일을 자원함과 즐거움과 감사함으로 직분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의 사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로, 종으로 살 것을 요구하며 교훈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의 사명을 말씀하셨습니다. 45절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섬김은 자기 목숨을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신 것입니다. 대속물은 ‘뤼트론’ 으로 전쟁포로를 되찾기 위해서나, 노예를 석방이나 해방시키기 위해서나,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속전을 말합니다. 이것은 구속사적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최고의 섬김이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이 섬김을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명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사명을 알면 섬기는 자로 살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은‘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유인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되도록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많은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자발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자발적으로 희생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인정을 받을 뿐만 존경 받을 자로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성장했으면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를 섬기고, 성도들을 목회자를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함께 성장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성장하는 줄 믿습니다. 오늘 주보에 넣어 드린 VIP 작성서를 기도하며 작성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을 여러분의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관심을 갖고 사랑하며 섬겨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구원 받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명은 섬김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도 섬김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우리는 섬김과 함께 예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의미하는 대표적인 히브리어는 ‘아바드’입니다. 이는 ‘봉사, 섬김이란 뜻으로, 영어의 service(서비스)와 유사한 개념입니다. 그리고 헬라어로 ‘라트레이아’는 ‘(종으로서) 섬기다’ (마4:10)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섬김은 무엇에 있습니까? 예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섬김의 시작이며 마침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가 교회와 사람도 잘 섬길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