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명, 그리스도인의 사명(1) - 사명을 알면 헌신하다 - 마태복음 9:9-13 예화) 세 사람의 석공 세 사람의 석공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돌을 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한 사람이 다가가 질문을 했습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자 한 사람이 짜증스럽게 대답을 했습니다. “보면 모르시겠소? 돌을 다듬고 있지 않소.” 두 번째 사람이 대답을 합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입에 풀칠이나 하려고 이 일을 하고 있는 중이요.” 세 번 사람이 대답을 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이 부족한 사람이 석공 일을 배워서 이렇게 거룩한 성전을 짓는 일에 한몫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똑같은 일을 하면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일을 하며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한 사람은 그들과는 달랐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에 있습니까? 바로 사명에 있습니다. 그는 성전을 짓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무거운 돌을 옮기고 다듬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사명을 알면 헌신한다’ 라는 제목을 말씀의 은혜를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명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사명에 대해 생각하고 헌신을 결단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주로 갈릴리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다라 지방에서 무덤 가운데 살던 군대 귀신들린 사람에게 있었던 귀신을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심으로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이에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떠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 예수님은 배를 타고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네 사람이 들고 온 침상에 누워있던 중풍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음을 증거하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님으로 인해 건강하게 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거리를 지나가시다가 한 사람을 보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9절은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사람은 마태였습니다. 그는 세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세금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세금 중에 하나가 통행세였습니다. 마태는 그 통행세를 받는 세리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었으며, 창기와 이방인과 더불어 죄인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에 세금을 바치기 위해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고 착복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리를‘동족을 피를 빨아 먹는 거머리’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세리 마태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를 부르시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백성들로부터 비난과 정죄를 받을 뿐만 아니라 죄인으로 취급을 당하며 멸시받는 자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제자로 부름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헌신하는 사람을 세우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랑이 헌신자가 되게 합니다. 마태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헌신하는 사람들이 세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태와 식사를 하신 예수님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10절은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의 집에 들어가셔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 식사 자리를 예수님의 요청으로 인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마태의 초대로 이루어진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마태의 요청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은 자는 사랑을 베푸는 자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할까요? 헌신하는 자로 살지 못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상실 때문입니다. 신앙생활과 헌신은 은혜와 사랑에 대한 거룩한 응답이며 반응입니다. 지금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헌신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마태가 식사를 하는 자리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제자들과 함께 앉아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11절은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향해 왜 너희들의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느냐고 했습니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불편함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 규례였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들과 식사를 하면 비난과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비난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첫째, 그들의 영적 실상을 말씀하셨습니다. 12절은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병든 사람들에게 의사는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는 마태를 비롯한 세리와 죄인들의 영적 실상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영혼의 의사가 되시는 예수님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은 바리새인들에게도 예수님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지도 못했으며 인정하지도 않았을 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영적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영적인 곤고함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분은 영혼의 의사가 되시는 예수님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예수님은 필요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인생의 곤고를 채워주십니다. 인간의 상처와 아픔을 치료하십니다. 우리의 영적인 실상을 인정하고 영혼의 의시가 되시는 예수님께 맡길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치유하심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사명을 말씀하셨습니다. 13절은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들을 위해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의인을 위해 오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 든 자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이 병든 자들과 죄인들에게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들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명을 알고 계셨기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사명을 알면 헌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에 근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명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 역시 죄인들에게 있습니다. 연약한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긍휼의 마음입니다. 13절은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고 합니다. 우리가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긍휼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이었던 마태를 제자를 부르신 것들도,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도 모두 긍휼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합니다. 그 긍휼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명의 확신입니다. 13절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인을 부르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친구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먹기를 탐하는 자라는 멸시를 당했음에도 죄인을 만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 사명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명에 대한 바울의 고백을 읽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명도, 바울의 사명도, 그리스도인이 우리의 사명도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 가정 소중한 것을 드리는 거룩한 헌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가을은 추수의 계절입니다. 이 가을에 영적 추수의 일꾼으로 헌신했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명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는 것을 알고 확신했으면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영혼 구원의 기쁨을 경험하고 영광에 참여했으면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시고 전도대상자를 작정하시고 목장과 교회에 초청하셨으면 합니다. 거룩한 사명에 헌신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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