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에 대한 태도 베드로전서 4:12-19 예화) 희대의 소망 : 이희대소장 강남세브란스병원 암센터 소장이었던 이희대 박사는 20년간 암을 치료하던 전문가였습니다. 그런 이소장이 말기의 대장암을 앓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암환자를 치료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암환자들에게 치유와 희망을 주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대장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 교회에 잘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암 판정을 받은 1년 후에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교만이 땅에 떨어지고, 하나님을 받아 들였습니다. 이희대 소장은 암환자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인생의 고난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입니다. 언젠가는 끝이 있고 나가는 출구가 있죠. 그 고난을 이기면 예전보다 더 행복한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사망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삶’을 살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희대의 소망’ 이라는 책도 썼습니다. 그 책에서 “비록 암 4기로 투병을 했고 열 번 재발했지만 나는 고난 뒤에 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기 전에 고난을 주신다. 하나님은 비빔밥을 주신다. 고난과 축복을 섞어 주신다. 고난을 축복을 예비하는 것이다. 제 혈액형은 C형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크리스천 형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선의 길, 평안의 길, 새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희대 소장을 통해 고난에 대한 성숙한 태도, 신앙적인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암이라는 고난은 그를 더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온전한 신앙을 갖게 했습니다. 암을 20년간 치료하던 유명한 의사도 암이라는 고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고난이 없는 가정생활도, 가정생활도, 직장생활도, 사회생활도, 교회생활도, 신앙생활도 없습니다. 만약 고난이 없는 삶을 원한다면 불가능한 것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이 없는 삶이 아니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이 없는 삶이 아니라 고난을 극복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영적 실패를 교훈으로 성도들을 격려하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고난에 대한 신앙적인 태도에 대해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고난에 대한 신앙적인 태도가 있기를 원합니다. 고난을 신앙적으로 극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베드로는 시험과 고난에 대해 무엇이라고 합니까? 시험과 고난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적인 시험은 고난의 형태를 갖고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12절은‘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라고 합니다. 악한 마귀가 주는 유혹으로서의 시험은 파멸시키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험은 연단하려고 오는 것입니다. 그 시험은 달콤하고 평안한 환경과 상황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불 시험의 형태로 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성도들의 믿음을 연단하십니다. 시편 66편 10절에서 12절은‘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라고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시험하셔서 은을 달구어 정련하듯 연단하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연단을 하셨습니까?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등에 무거운 짐을 지우시고, 사람들을 시켜서 머리를 짓밟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과 물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침내 건지셔서 모든 것이 풍족한 곳으로 이끌어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시험과 고난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그 연단을 통해 순전한 신앙을 갖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연단으로서의 시험과 고난을 이상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성도들에 대해 고난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을 권면합니까? 우리는 고난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해야 합니다. 13절은‘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고 합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누구를 위한 고난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입니다. 우리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육체의 정욕을 추구하다가 받는 고난이 아닙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 고난은 무엇입니까? 14절은‘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영광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받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당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수치를 겪으며, 모욕을 당하며, 불편함을 느끼며,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성령의 강한 임재와 능력을 경험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할 때입니다.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교회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위로와 영광을 경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는 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고난을 받을 경우도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무엇 때문에 고난을 받지 말라고 합니까? 15절은‘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받는 고난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살인과 도둑질과 악행과 간섭입니다. 살인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죄악입니다. 도둑질은 다른 사람의 소유를 해하는 죄악입니다. 악행은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한 죄악입니다. 간섭은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을 하는 죄악입니다. 우리는 관심이 가져야 하지만 간섭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관심과 간섭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관심은 다른 사람이나 일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관심은 받는 사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간섭은 다른 사람이나 일에 대한 통제의 표현입니다. 간섭은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행하지 않으면 화를 낼 뿐만 아니라 나쁜 사람으로 정죄하기도 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이 아니라 간섭함으로 상처를 주기도 하며 관계를 훼손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혹시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고난에 대한 영적인 분별력이 있기를 원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6절은‘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예수님과 복음과 교회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수치스런 일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고난 받을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복음고하 교회를 위한 고난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다시 하번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이 아니라 악을 행함으로 얻는 고난에 대해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17절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도 일어납니다. 이는 하나님의 교회, 즉 성도들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순종한 성도들도 심판을 받습니다. 물론 이 심판을 영원한 불 못에 넣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겨우 구원을 얻은 의인입니다. 상급이 없는 구원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거면 겨우 구원을 받는 자가 아니라 천국에 상급이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복음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겨우 구원만 얻는 자가 아니라 천국에서 상급을 받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겨우 구원을 얻는 자가 아니라 상급을 얻는 자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무엇을 권면합니까? 19절은‘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우리의 영혼을 신실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 받는 것을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기억하시고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을 의탁하고 믿음으로 고난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고난이 아니라 불편함을 느낄 때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혹시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습니까? 헌신의 자리에서 떠나지 않습니까? 하지만 원망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고난 받을 때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우리에게는 축복이며 유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고난을 극복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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