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change) 빌립보서 3:4-14 우리 교회 2019년 표어가 무엇인가요? ‘일어나라 빛을 비추어라’ 입니다. 그런데 일어나 빛을 비추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3C로 change(변화)와 challenge(도전)과 calling(소명) 입니다. 이번 주일부터 세 가지 주제로 말씀을 나누며 은혜를 받았으면 합니다. 오늘은 변화에 대해 나누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변화에 대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계를 변화시키려고 하지만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변화시키기 어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반면에 가장 변화시키기 쉬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가족과 가정이, 교회와 성도들이, 나라와 국민이 변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혹시 모든 것이 변할지라도 변하지 않는 자신으로 인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변하면 변화시키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변화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모는 변화는 그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자신이 변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변화하게 만들었던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사울에서 바울로 변한 사람입니다. 그 바울의 변화에 대해 나누면서 거룩한 변화를 경험하고, 또한 변화를 일으키는 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 위해 베스도 총독 앞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베스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26장 24절과 25절은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라고 합니다. 베스도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바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향해 많은 학문으로 인해 미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눈에는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고 헌신하는 바울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니라 정상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바울은 4절에서 6절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엇을 신뢰하고 자랑했었습니까? 첫째, 좋은 출신 성분이었습니다. 5절은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라고 합니다. 그는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후손이었으며 베냐민 지파 출신이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유대의 순수한 혈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축복의 백성이었으며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누구와도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좋은 가문 출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출신 성분을 자랑했습니다. 둘째, 철저한 종교인이었습니다. 5절과 6절은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합니다. 그는 율법에 충실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약 6,000명 정도의 바리새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유대 종교의 정통성을 이어 오면서 정신적인 지도자요, 종교 지도자 그룹이었습니다. 그는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아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신앙과 생활의 척도가 되고, 그것이 의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율법 준수에 있어서 완벽한 자였습니다. 그는 유대교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셋째, 특별한 열심이었습니다. 6절은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라고 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에게 있어서 종교적인 열심은 가장 큰 미덕이요, 최대의 존경과 칭찬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데 보증이 되었으며, 예수님을 믿는 것은 율법에 배치되는 것으로 극렬하게 반대를 하면서 박해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유대교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혹시 ‘수저계급론’ 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다. 이것은 2015년부터 시용된 사회이론을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로 출신을 나누는 것입니다. 본래 은수저는 유럽의 귀족 층에서 은식기를 사용하고 유모가 은수저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울은 금수저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었으며 동시에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탁월한 스승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산헤드린 공의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출신도 좋았으며 학벌도 뛰어났으며 일찍 성공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무엇을 내세우고 있습니까?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출신이나 지식이나 재물이나 성공이나 행실을 내세우며 자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만나 구원 받기 이전의 삶은 육체적인 것을 내세우며 자랑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구원 받은 성도들은 그것들을 자랑하지 않아야 하는 줄 믿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만난 후의 바울은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는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의 바울은 육체를 신뢰했으며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을 유익한 것으로 여기고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에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변화는 무엇입니까? 첫째, 인생의 가치관이 변했습니다. 7절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생각하고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8절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고 합니다. 8절과 9절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라고 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배설물로 여김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며, 예수님 안에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가치 지향적인 존재입니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덜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알기 까지 우리는 모든 것을 무익한 것으로 여기고 버릴 수 없습니다. 종종 우리는 예수님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 안에서 살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화) 성프란시스 프란시스는 매우 부유한 상인의 맏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부상을 입었으며, 치료를 받는 중에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가문으로부터 핍박과 회유를 받았습니다. 그의 장자권에 대한 재판이 열렸습니다. ‘예수를 버려라 이제라도 예수를 버리면 프란시스가의 장자로서 막대한 재산을 상속 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막대한 재산을 상속 받지 못할 수도 있다’ 는 재판관의 판결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프란시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무너진 교회를 향해 올라갔다고 합니다. 바울도, 기독교 역사의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왜 그들이 자랑하고 신뢰하던 모든 것들을 음식의 찌꺼기와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손에 붙잡고, 가슴에 품고 있으면 예수님을 위해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얻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며,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삶이 가장 가치 있는 것임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도 배설물처럼 여겨야 할 것은 없습니까?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열리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인생의 목적이 변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만나기 전에는 대단히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것을 얻고 누리며 교만한 자로 살았습니다. 그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겸손한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는 바울의 겸손을 무엇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12절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고 합니다. 그는 자신은 아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완성되었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했으며,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신앙과 삶에 대해 하나님 앞에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13절과 14절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아직 목표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목표를 향해 힘껏 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실 그리스도도 예수 안에 있는 상을 바라보며 달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에 두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교만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으며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인생의 목적이 변했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며 겸손했습니다.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했습니다. 세상이 아니라 천국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기독교 철학자가 어느 날 간절히 기도를 하는 중에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줄까?’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주저 없이 ‘나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원합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평생 사는 것이 아퀴나스 인생의 목적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위대한 고백과 변화가 있었으면 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변하며 마음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면 행동이 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놀라운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가치관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변해야 합니다. 삶의 방식과 태도가 변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변질되는 자가 아니라 변화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변질된 자를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변화가 일어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먼저 우리가 변할 때 변화시키는 자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우리에게 계속해서 변화의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 변화되어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나라를 변화시키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