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7) : 라오디게아 교회 요한계시록 3:14-22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에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러브레터를 보내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곱 교회에 대한 칭찬과 책망은 모두 사랑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책망과 칭찬을 함께 받은 교회는 에베소와 버가모와 두아디라 와 사데 입니다. 또한 칭찬만 받은 교회는 서머나와 빌라델비아입니다. 반면에 책망만 받은 교회는 라오디게아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은혜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에서 동남쪽으로 약 72Km에 있었습니다. 그곳은 골로새와 히에라볼리와 함께 비옥한 리쿠스 계곡의 도시들 중의 하나였으며, 골로새서를 돌려 읽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군사와 무역과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특히 탁월한 효능이 있는 안약 생산지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고 하신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4절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라고 합니다. 그 주님은 아멘이시며 충성이며 참된 증인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충성하는 진정한 증인으로 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순종하며 충성하는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주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 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창주물이라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은 교회를 세우셨으며 주관하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주관하십니다. 이에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실상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첫째, 미지근한 물과 같았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를 말씀하십니다. 15절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고 합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행위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차지도 않았으며 뜨겁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미지근하여 입에서 토해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라오디게아는 물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에서는 차가운 물을, 히에라볼리에서는 뜨거운 온천수를 끌어다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물들이 송수관을 통해 라오디게아에 오면서 차가운 물은 데워지고, 뜨거운 물은 식어져서 미지근한 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섞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석회질이 섞인 미지근한 물은 마실 수 없었으며, 혹시 마시면 구토를 일으켜 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였습니다. 영적으로 미지근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그것은 형식적인 신앙을 말합니다. 형식이나 모습보다 중요한 것은 중심과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형식적으로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마지못해서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생활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예배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금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열정적으로 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해 해야 합니다. 자원함으로 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가 드리는 모든 것을 토해 버리십니다.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와 교회는 확실한 신앙적 고백을 갖고 최선을 다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고 받으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하고 있는 착각을 지적하십니다. 17절은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유한 상태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고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곤고하며 가련하며 가난하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눈은 멀었으며 벌거벗고 있었지만 모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는 재물이 많고 소유가 넉넉함으로 인해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세상적인 소유와 성공에 대한 만족함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영적인 기근과 결핍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착각 중에 하나는 육신적인 것에 어려움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재정적인 풍요와 안정이 좋은 신앙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신앙생활에 안주하고 교만해 지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풍요롭고 성공했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하고 실패한 것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영적인 풍요와 안정과 만족이 있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주님은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며 착각을 하고 있는 교회를 향해 무엇을 권면하셨습니까? 형식적인 신앙생활과 세상적인 신앙생활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에 있습니까? 첫째, 영적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18절은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고 합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가난했으며 영적 소경이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세 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을 향해 온전한 믿음, 순전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믿음에 부유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또한 흰옷을 사서 입에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검은 양모로 만든 옷을 입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얻은 의의 옷을 자랑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볼 수 있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 영적인 상태를 발견해야 했습니다. 여러분의 영적 실상은 어떻습니까? 혹시 영적으로 가난하고, 수치스럽고, 볼 수 없는 신앙상태는 아닙니까? 우리의 영적 실상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부요함과 거룩한 행실과 영적인 눈이 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책망과 징계에 반응해야 합니다. 19절은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고 합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성도들의 형식적이고 세속적인 신앙생활을 책망하시고 징계하십니다. 하지만 그 책망과 징계는 교회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5절은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책망과 징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낙심하거나 시험에 들지 않아야 합니다. 그 징계를 우리를 사랑하시는 매로 받아야 하는 줄 믿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과 징계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열심을 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이는 주님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온전한 신앙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영적 실상을 발견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많은 성도와 교회들이 회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회개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회개가 있는 곳에 회복이 있습니다. 형식적인 신앙, 세속적인 신앙에 대한 회개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은 책망을 받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중요한 약속을 하십니다. 그것은 책망과 징계를 받고 회개하고 회복하는 교회에 주는 축복입니다. 첫째, 신령한 영적 교제를 하실 것입니다. 20절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고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열린 문의 은혜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닫힌 문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교회였지만 주님을 밖에 두고 있었습니다. 성도는 성도였지만 주님과 신령한 영적 교제가 없었습니다. 그 주님이 문 밖에서 두드릴 때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들어오십니다. 함께 먹고 마실 것입니다. 주님의 책망과 징계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는 것이 문을 여는 것입니다. 문을 열면 주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주의 신령한 임재를 경험하고, 신령한 교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주의 보좌에 앉게 하실 것입니다. 21절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고 합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의 보좌에 앉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천국의 영광을 경험하기 원하십니까? 하늘 권세를 갖고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영적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형식적인 신앙, 세속적인 신앙을 극복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회복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혹시 우리도 형식적이고 세속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혀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기 원합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실상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책망과 징계를 통해 회개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열심이 회복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신령한 임재와 교제를 경험하는 교회, 천국 보좌의 영광과 권세를 누리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교회를 우리 함께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