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를 사는 신앙생활 베드로전서 4:7-11 예화) 마지막으로……. 지난 몇 주 전에 미국에서 사역을 하는 어바나 샴페인 예수사랑교회 오치용 목사님이 우리 교회를 방문하여 함께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오목사님이 한국에 오시기 전에 먼저 딸이 한국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다니시는 교회에 함께 출석하여 어른 예배를 함께 드리는데 목사님들이 설교를 너무 길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40분 정도를 설교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흥회 강사로 오신 목사님은 한 시간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하기 전에 잘 들으면 한 시간 내에 끝날 거라고 해놓고 한 시간이 되니까? 여러분들이 잘 들어서 조금 더 해도 되겠느냐고 웃으면서 물으셨습니다. 그 상황에서 ‘아니오’ 라고 할 사람이 없어 다들 ‘예’ 라고 했습니다. 그 때 그 자매만 할머니만 들을 수 있게 ‘아니오’ 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오목사님이 ‘아빠는 20여분 남짓 하니까 그래도 괜찮지 않냐’ 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것도 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믿으세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셨으니까요” 라는 것이면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설교의 핵심 포인트이기에 설교가 길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딸의 말에 마땅히 대꾸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종종 설교가 길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길어지는 것을 설교자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이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결론이 본론이 됩니다. ‘이제 끝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한 말씀이 끝이 아닙니다. ‘이에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이 아니라 다시 설교를 시작합니다. 베드로도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7절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만물의 마지막에 대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시간적 의미에서 종말을 말합니다. 즉 말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 세상의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말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한 만물의 마지막은 시간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강조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말세에 나타날 현상만 아니라 말세를 사는 성도들의 신앙에 대해 강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하는 것은 만물의 마지막, 즉 말세에 대해 베드로의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는 말세를 사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권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세의 신앙생활은 어떠해야 한다고 합니까?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첫째, 기도해야 합니다. 7절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고 합니다.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의미도 가치도 중요성도 필요성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기도하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사무엘은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이게 하고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말세에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악한 마귀의 간교한 속임과 역사 때문입니다. 사무엘 차드윅은 ‘마귀의 한 가지 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로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 마귀가 교인들에게서 이 무기를 빼앗거나 그것의 사용을 제지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악한 마귀는 기도에 대해 무관심하게 합니다. 기도라는 강력한 영적인 무기를 빼앗아 갑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세에 기도하기 위해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그것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4장 37절은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고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지 않고 잠을 자는 베드로를 향해 책망하셨습니다. 이는 육신의 잠만 아니라 영적인 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세에 기도하지 위해 필요한 것은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랑해야 합니다. 바울은 말세에 나타는 사랑은 자기를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며 재물을 사랑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합니다(딤후 3:2, 4).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사랑의 상실과 변질입니다. 사랑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없는 세대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악을 행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랑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런 말세에 베드로는 사랑에 대해 무엇을 권면합니까? 8절은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고 합니다. 베드로는 말세에 무엇보다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진정한 사랑의 가치와 중요성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무엇입니까? 죄를 덮어 주는 것입니다. 말세에는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추고 수치스럽게 만드는 일에는 열심을 내지만, 죄와 수치를 감추고 덮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런 세대에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어떻게 사랑하라고 합니까? 베드로는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먼저 뜨거운 사랑입니다. 이는 최선을 다한 사랑, 열정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받기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온전한 사랑은 받기만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받는 사랑에서 주는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을 하고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말세에 그런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대접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지난 4주간 출석을 하신 서울 세검정교회 이영선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제주에 한 달 살기를 위해 딸과 함께 내려왔습니다. 한 달 동안 매주 주일예배에 참석을 하고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영유치아동부 성경학교를 마치고 화순해수욕장에 갈 때는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제주에서의 한 달 살기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가 이런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왠지 내일 동도교회 가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한 달 동안 나그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 감사드립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님 당시에도 대접을 받기를 원하지만 대접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누가복음 6장 31절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면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대접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통해 다른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대접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대접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알기에 베드로는 무엇을 권면합니까? 9절은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라고 합니다. 그는 대접에 대해 먼저 서로 대접하라고 합니다. 이는 대접을 받기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로 대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종종 대접을 받기만 하고 대접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원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3절과 4절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구제할 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구제를 하고 구제한 것을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접이나 구제를 하고 받은 사람이 반응이 없으면 섭섭하거나 원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세는 사는 우리는 서로 대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대접을 받지 않는다고 원망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대접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대접해 주실 줄 믿습니다. 넷째, 봉사해야 합니다. 말세가 되면 나타나는 현상은 주의 일에 힘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헌신의 자리에서 떠날 뿐만 아니라 헌신의 열심과 열정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주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했었습니다. 휴가를 여름성경학교를 위해 보내기도 했습니다. 우선순위를 주의 일을 하는데 두기도 했었습니다. 그 분들이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힘이 들고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바쁘고 힘들고 불편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말세가 되면 봉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0절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고 합니다. 그는 말세를 사는 성도들을 향해 청지기와 같이 봉사하라고 권면합니다. 청지기는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교회를 섬기기 위한 직분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서로 봉사해야 합니다. 서로 섬겨야 합니다. 함께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진 사역과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한 청지기로 봉사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섬김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습니다. 사역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고 최선을 다해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세를 사는 성도들은 기도하고 사랑하고 대접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11절은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이라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기도도 사랑도 대접도 봉사도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않아야 겸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더 낮은 자리에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종종 봉사를 요청 받으면 할 수 없다고 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교회 일은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는 믿음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도, 대접할 수 있는 물질도, 봉사할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그 모든 하나님께 은혜로 주신 것인 줄 믿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기도도 사랑도 대접도 봉사도 우리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하는 것이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과 대접은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봉사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고 대접하고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말세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사랑과 대접과 봉사에 대한 많은 유혹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세를 사는 여러분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사랑의 삶은 어떻습니까? 대접하는 삶은 어떻습니까? 봉사생활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말세를 지혜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세에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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