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요한일서 2:15-17 예화) 사랑은 선택이다 사랑은 운명일까요? 아니면 선택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운명적인 선택일까요? 게리 채프먼이 쓴 ‘사랑의 5가지 언어’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5가지 사랑의 언어가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표현하는 다른 주된 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십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에 의존한 결과물이 아니라 의지적인 선택에 의해 갈고 닦을 수 있는 보석과 같은 것이다” 라고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이에서 청년으로, 청년에서 아비로 성장을 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해야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성장과 신앙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영적 분별력입니다. 성도들이 분별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면 마귀가 원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은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 반드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할 말입니다. 우리의 말은 대단한 능력이 있습니다. 말은 배를 움직이는 키와 같습니다. 혀는 온 몸을 불사르는 불과 같습니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며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무엇을 권면합니까? 에베소서 4장 29절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고 합니다. 성도들이 하지 말아야할 말은 더러운 말입니다. 반면에 성도들이 해야 할 말은 덕을 세우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선한 말은 은혜를 끼쳐 사람을 세우지만, 더러운 말은 사람을 넘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셋째, 사랑해야 할 것과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과 사랑해야할 것을 매우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2절과 4절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라고 합니다. 말세에 성도들이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부적절한 자기 사랑과 재물과 세상 쾌락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사랑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하지 말아야할 것을 사랑하는 자는 불경건하게 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경건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분별력을 주시기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해야 할 말을 분별하고, 사랑해야 할 것을 분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에 요한은 성도들이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세상을 크게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로서의 만물을, 하나님이 구원해야할 사람을,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체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로, 때로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한이 언급한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것들이란, 하나님의 떠난 세상의 체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승리하고 변화시켜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가 불행한 인생을 살고, 영적으로 패배하는 것은 사랑해야할 것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분별력과 믿음을 주시길 바랍니다. 요한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5절 하반절은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은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할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지 말아야할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할 귀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이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한은 성도들이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잘 살펴서 받은 것은 받고, 거부할 것은 거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는 모든 것은 선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만이 좋은 선물이며 온전한 선물입니다. 심지어는 지혜까지도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는 것은 세상적이며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무엇입니까? 16절은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고 합니다. 요한은 세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것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육신의 정욕입니다. 이는 육체의 쾌락에 대한 욕구입니다. 즉 육신의 즐거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 22절은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고 합니다. 육체의 쾌락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이 주는 영적 유혹일 수 있습니다. 둘째, 안목의 정욕입니다. 이는 소유에 대한 욕구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것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1장 8절은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라고 합니다. 눈으로 보면 갖고 싶은 것이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얻어도 만족이 없습니다. 셋째,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는 인정에 대한 욕구입니다. 즉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9장 23절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고 합니다. 사람들의 자랑은 지혜와 권세와 재물에 있습니다. 그것을 자존감을 높이기도 하며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세 가지는 마귀가 사용하는 영적 미혹입니다. 이것은 악한 마귀와 세상으로부터 나와 인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언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통해 유혹했습니까? 에덴동산 | 먹음직(창 3:6) | 보암직(창 3:6) | 지혜롭게(창 3:6) | 예수님 | 먹으라(눅 4:3) | 주리라(눅 4:6) | 받들리라(눅 4:11) | 성도들 | 육체의 정욕(요일 2:16) | 안목의 정욕(요일 2:16) | 이생의 자랑(요일 2:16) | 말세 | 쾌락 사랑(딤후 3:4) | 재물 사랑(딤후 3:2) | 자기 사랑(딤후 3:2) |
마귀가 맨 처음 인간을 영적으로 미혹하기 위해 찾아온 것은 에덴동산이었습니다. 마귀는 하와를 향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아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하와는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3장 6절은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합니다.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자 먹음직스럽게 보였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정욕입니다. 그것이 보암직했습니다. 이것은 안목의 정욕입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이것은 이생의 자랑입니다. 사실 하와가 무너진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이 마귀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셨을 때 다시 나타났습니다(눅 4:1-13). 그는 예수님을 향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정욕입니다. 천하 만물을 보주고 자신에게 절하면 모두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안목의 정욕입니다. 높은 탑에 올라가 뛰어 내리면 천사가 받들러 상하지 않고 이름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와와는 달리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성도들을 유혹하여 넘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말세를 사는 성도들에게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유혹을 알고 그것을 잘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이 자랑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령 충만하여 재미가 아닌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소유의 욕망이 아니라 자족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인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마귀와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새의 자랑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욕이 아니라 거룩한 삶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도, 정욕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도 영원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영원한 멸망을 당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