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대언자이십니다 요한일서 2:1-3 예화) 예수님은 누구신가? 충청북도 지방에서 활동한 외국인 선교사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민로아 (밀러, 1866~1937) 목사입니다. 그는 1892년 11월 15일 부인 안나 라이네크(Anna Reinecke)와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후에 민로아 목사는 장로교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충청도 지방에 선교의 뜻을 두고 1900년에 김흥경(金興京) 조사와 함께 청주 시장에 들러 노방전도를 했습니다. 그는 1904년 청주에 도착하여 1937년에 생을 마칠 때까지 충북 선교의 아버지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미국에서 갓 결혼하여 낯선 한국 땅에 왔는데, 내내 자식이 없어 쓸쓸하였습니다. 자식을 기다리고 있던 중 입국 6년만인 1898년 11월에 첫 아들 프레드 밀러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열악한 환경과 위생에 적응하지 못하고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자식을 보낸 그 아픔이 사라져 가려 할 때 쯤, 둘째 아들을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1902년 3월에 둘째 아들 프랭크 밀러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루 만에 하나님이 그 아이를 데려가셨습니다. 둘째 아들을 잃은 후 1903년 6월 17일에, 사랑스런 아내가 38세의 일기로 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이었습니다. 조선 땅에서 두 아들과 아내를 잃어버린 모든 일을 지켜보던 조선 사람들은 민로아 선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전하는 예수가 누구기에 이렇게 당신을 힘들게 하는 겁니까?” 그들의 질문을 받고 민로아 선교사는 찬양을 지어 불렀습니다. 그것이 찬송가 96장의 ‘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민로아 선교사가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잃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믿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알아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알고, 믿고, 닮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믿기, 닮기, 살기가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사랑하는 영적인 자녀인 성도들을 향해 편지를 쓰게 된 목적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1절은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고 합니다. 요한에게는 매우 간절한 소원과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성도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유혹에 시험당하고 흔들리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바라보며 요한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심정으로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죄에 대한 태도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1절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라고 합니다. 세상과 마귀에 속한 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만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유혹하여 죄를 짓도록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속한 자는 죄를 가장 두려워합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킵니다. 죄를 보면 분노하며, 죄를 범하면 슬퍼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충만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지배를 받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순종함으로 죄를 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죄를 이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지만 연약한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만일’ 이라는 단어를 통해 혹시 있을지 모른 일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지만 혹시 죄를 범한다 할지라도 결코 절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만일 죄를 범한다할지라도 절망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1절 하반 절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고 합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파괴합니다. 우리를 더 추하고 더럽게 만듭니다.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 잡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의 내면과 생활은 혼란스럽고 엉망으로 변하게 만듭니다. 때로는 건강을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만일 죄를 범하면’ 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일생동안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날은 단 하루도 없을 것입니다. 마음으로,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심지어 무의식에서까지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있습니까? 이런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면 낙심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숨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너무 염치가 없습니다. 다시 일어날 용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고 소망을 얻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대언자이십니다. 대언자라는 말은 ‘보혜사’ 라는 단어와 같은 ‘파라클레토스’ 로 즉 ‘변호사, 위로자’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변호사가 되셔서 우리의 죄에 대해 변론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완벽한 변호사이십니다. 그런데 대언자 예수님과 다른 존재가 있습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요한계시록 12장 10절은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성도들을 참소, 즉 고소하는 악한 마귀입니다. 참소자는 kathvgwr(카테고르) 로 비난자, 정죄자입니다.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죄에 대한 참소자가, 아니라 대언자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비난하고 정죄하는 자가 아니라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그 누구도 우리를 변호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검사처럼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찾는데 열심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옆에 오면 부담감이 듭니다. 때로는 불편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또 어떤 잘못을 지적 받을까? 오늘은 또 어떤 말을 들을까? 오늘은 또 어떤 비난을 받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검사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보지 말고 변호사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연약한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하여 죄책감에 빠져 있고, 낙심하고 있을 때, 그 누구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 때 우리의 변호사가 되어 주십니다. 그러나 아무나 변호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합당한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언자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1절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자기 의에 빠진 사람은 죄를 범한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지만, 의로우신 예수님은 연약함을 동정하십니다. 긍휼히 여기십니다. 의로우신 예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이에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면 긍휼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용서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의로우신 예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2절은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합니다. 죄인을 변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죄를 미워하지만 죄인은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를 너무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우리는 용서 받았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 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저주와 심판을 받아 영원한 사망에 처해야 했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이 시대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성도들까지도 죄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과 경건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연약하여 죄를 범하면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언자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향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의 대언자 되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다시 일어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악한 마귀와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