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 요한일서 1:5-10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와 사귀느냐? 그 사귐을 어떻게 유지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게도 행복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에 있는 많은 사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저주에서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오늘 성찬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을 생각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 성찬식을 통해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와 능력을 통해 하나님과 더 친밀한 사귐이 회복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 많은 말씀을 들었으며, 그것을 요한일서를 읽는 그 당시의 성도들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듣고 전해 주려고 한 말씀은 무엇입니까? 5절은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고 합니다. 요한은 하나님과의 사귐 즉 친밀한 영적 교제를 위해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자 언급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더 친밀한 사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어둠이 전혀 없으십니다. 이는 하나님은 생명과 진리와 거룩함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는 빛 가운데 살아가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진리를 행하며 걸구하게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두움이 아니라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거룩한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죄악 된 생활을 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라고 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연약하기에, 실수하여 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생각을 갖고 지속적으로 의도적이고 반복적으로 죄를 범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죄 가운데 살지 않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면 그 자리에 멈추어 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거룩한 삶은 믿음의 능력이며, 세상을 향한 선교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표징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생활은 우리의 영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 가운데 행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9절에서 11절은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고 합니다. 요한은 빛 가운데 사는 것을 사랑하는 것으로, 어둠 가운데 사는 것을 미워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을 자주 미워하거나 시기하고 질투하며, 판단하고 정죄하며,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지금 하나님과의 사귐이 단절되어 있거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손상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주는 영향은 무엇입니까? 7절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합니다. 죄는 하나님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파괴합니다. 가정에 죄가 들어오면 가정이 해체되고, 교회에 죄가 들어오면 교회가 혼란스러워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가 들어오면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리지 못하며, 기도해도 응답을 받지 못하며, 아무런 능력과 역사도 행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사랑 안에서 살게 되면 모든 관계는 회복되며, 소망과 능력이 충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나 사람들과의 관계에 갈등과 손상이 있다면 반드시 죄에 대해 점검해야 합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모든 관계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으며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가 예수님과 상관이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이 없이 사는 사람은 지금도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 민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의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보이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부인하고 고백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10절은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8절과 병행을 이루는 구절로 만일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하면 어떤 것입니까? 첫째,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6절은 ‘거짓말을 하고’ 라고 하며, 8절은 ‘스스로 속이고’ 라고 하며, 10절은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이로’ 라고 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도 못합니다. 선을 행하는 자도 없습니다. 그런데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거나,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둘째, 진리와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8절은 ‘진리가 우리 속에 없다’고 하며, 10절은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진리와 말씀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죄를 발견하고 고백하며 사죄의 은총 안에서 살기 위해 겸손히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반면에 죄를 스스로 고백하면 어떠한 일이 있습니까? 9절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합니다. 우리의 영성은 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발견하고 자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발견하고 애통해 하고 회개하며 모든 죄를 고백할 때가 가장 겸손할 때입니다.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할 때가 가장 복된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죄 용서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며,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잘못을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과 진정한 사귐을 위해 죄에 대해 민감하고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발견하고 자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은 죄가 많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안에서 진정한 행복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모두 성찬을 통해 빛이신 하나님,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이 더 깊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귐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