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사귐은 유익합니다 요한일서 1:1-4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관계 속에서 생활합니다. 이 관계는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축복인 동시에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특히 인간관계는 한 사람이 생존을 하고, 정체감을 확립하고, 건강한 성격을 발달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합니다. 인간관계는 삶의 중요한 영역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관계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온전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신앙생활에 있어 대신관계, 대인관계, 대물관계를 중요시 했습니다. 그 관계를 통해 신앙의 성숙함과 온전함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재물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요한일서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핵심인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요한일서를 ‘사랑의 편지’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로, 또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일부터 요한일서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행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사랑의 관계를 교제, 혹은 사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교제와 사귐이라는 단어는 ‘koinwniva’(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는 단순한 인간적 친교나 교제의 차원을 넘어 가난한 자를 돕고 물질을 공유하는 구체적 사랑의 행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 간의 교제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성도와 하나님 사이의 신령한 교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교제, 즉 영적 사귐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영적 사귐의 핵심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성도들의 사귐에 있어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입니다. 요한은 영적 사귐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1절과 2절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고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세 가지 진리를 고백하며 선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요 1:1)이라고 했으며,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계 19:13)이라고 했으며, 요한일서에서는 ‘생명의 말씀’(요일 1:1)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한 것은 ‘생명이신 말씀’이요 ‘생명을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 그 자체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하신 것처럼, 재창조라고 하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습니다. 2절에서 ‘생명’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참되고 온전하고 영원한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이요,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어떠한 일이 있습니까? 요한일서 5장 12절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자는 본질적으로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요, 영원히 사망에 이를 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과 사귐이 있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이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는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합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 하나님과 함께 하신 말씀을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영원 속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분으로 역사 속에 실재하신 분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이 온전한 신앙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교제를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물론 모든 것을 알 수 없지만 기본적인 것은 알아야 교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교제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 사람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영적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도한 영적 사귐을 통해 예수님을 더 알고 사랑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통해 더 주님을 깊이 알고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영적 사귐은 확장되어야 합니다. 요한이 활동하던 당시에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실제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환상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영은 거룩하고 육신은 불결하기에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교훈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은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랐던 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과 생활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손으로 만져 보기도 했으며, 그 품에 안겨 보기도 했습니다. 3년 동안 함께 식사도 하고 잠도 자고 함께 공동생활을 해보았습니다. 그는 전인적으로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으며,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의 실제적인 체험에 근거하여 무엇이라고 합니까? 3절은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것을 통해 어떠한 것을 알 수 있다고 합니까? 예수님과의 영적 사귐은 무엇을 통해 확장될 수 있습니까? 첫째, 선교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이라고 합니다. 누가 예수님을 전할 수 있습니까? 요한처럼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눈 자입니다. 성육신의 의미를 아는 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거룩한 영적 경험이 있는 자가 확실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던 사울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며,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주님을 전하게 됩니다. 성육신을 이해하는 것은 복음을 받는 자들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들에게 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초대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한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빵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성육신의 원리에 따른 선교였습니다. 성경번역선교회라는 ‘GBT’는 복음을 들어야 하는 나라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나아가 언어가 없는 나라에는 언어를 만들어 주며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선교사들이 성육신의 원리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그것을 활용하여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님과의 거룩한 영적 체험을 주시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체험한 예수님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교제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를 경험 한 후에 진정한 교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날마다 집에 모여 떡을 나누었습니다. 자신의 가진 소유를 팔아 연약한 자들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성도들이 나누는 교제는 그 기초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교제를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 영광 버리시고 낮고 천한 곳에 오셨으며, 벌레만도 못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처럼 철저하게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낮아져야 합니다. 다른 성도들과 진정한 교제를 나누지 못하는 것은 아직 낮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많은 것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누는 진정한 교제는 먼저 우리와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성육신의 원리를 이해하고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어야 합니다. 바른 신앙의 고백 가운데서 바른 영적 교제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영적 사귐이 이루어 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영적 사귐은 유익합니다. 4절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고 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정한 기쁨을 모든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알고 있는 기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듣고 보고 주목하고 만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친밀한 영적 교제를 통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 기쁨을 이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맛보기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과 같이 사람들이 예수님과 사귐을 갖고, 나아가 성도들이 서로 진정한 영적 교제를 나눔으로 진정한 기쁨이 충만하기를 위해 이 편지를 쓴다고 말합니다. 교제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셨습니까? 근심이 있고 우울하던가요? 아니면 기쁘고 행복해 하던가요? 감기와 연애는 감출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거룩한 사귐, 영적 사귐을 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얼굴과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기쁨과 행복이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과의 사귐을 통한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복된 만남과 사귐은 예수님과의 만남과 사귐입니다. 예수님과의 영적 사귐은 축복입니다. 그것은 최고의 유익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는 영적 사귐으로 기쁨과 행복을 경험합니다. 예수님과 영적인 사귐을 가진 우리들은 서로 함께 말씀을 나누고, 함께 기도를 나누고, 함께 사랑을 나누는 거룩한 교제를 해야 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영적인 사귐을 나눌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영적인 사귐을 나눌 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영적인 사귐이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