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주일예배

제목피리를 불면 함께 춤을 추자(마 11:15-19)2024-09-12 14:51
작성자

피리를 불면 춤을 추자

마태복음 11:15-19

 

신경정신과 의사인 이시형 박사가 청소년들의 정신건강과 문제를 언급하면서 골목 문화의 상실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전에는 아이들에 집에서 나와 골목에서 놀이를 하면서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어떤 게임을 할 때도 깍두기를 두었습니다. 깍두기를 두는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나이가 어리거나 실력이 많이 떨어지는 아이를 놀이에 끼워주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달리기 시합을 할 때도 형들은 동생들을 몇 미터 앞에 세워서 출발하게 하거나, 시간 차를 두고 출발시켰습니다. 그것을 통해 함께 살아가며 노는 것을 배웠으며,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생활을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골목 문화가 사라지고, 혼자서 지내며 놀고, 특히 혼자서 게임을 하고 휴대전화를 하면서 청소년들이 성숙한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을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밖에서, 많은 놀이를 했습니다. 그 놀이는 무엇이었습니까? 말뚝박기입니다. 이 놀이는 편으로 나뉘어 한 사람은 벽에 등을 기대고 기둥이 되어 똑 바로 서고 나머지 사람은 허리를 숙여 앞사람의 가랑이에 머리를 끼워서 줄을 만드는데, 상대편 사람이 그 줄위에 올라타서 그줄이 무너지면 역할을 바꾸고 무너지지 않으면 줄위에 가장 먼저 올라탄 사람이 기둥이 되어 선 사람과 가위바위보를 하여 진팀이 다음 차례에 줄이 되는 것입니다.

 

고무줄 놀이입니다. 고무로 만들어 신축성이 좋은 줄을 이용하는 놀이로 고무줄을 양쪽에서 잡아주면, 노래에 맞추어 다리에 고무줄을 걸거나 가로지르며 노는 놀이입니다. 주로 여자아이들이 했으며, 조종 남자 아이들이 고무줄을 끊고 도망을 가기도 했습니다.

 

딱찌치기입니다. 딱지 한 장을 땅바닥에 놓고, 다른 딱지로 쳐서 뒤집히면 따 먹는 놀이입니다. 이 놀이는 주로 남자들이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놀이는 무엇인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이 놀이는 제가 살던 곳에서는 오징어찡이라고 했습니다. 오징어 그림을 그려 놓고 한발로 뛰면서 했던 놀이입니다. 2021년에 넷플릭스에서 했던 오징어 게임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놀이에 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그 당시의 세대에 대해 언급하며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15절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귀의 용도를 설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귀는 있어도 듣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책망입니다. 하나님께서 귀를 주신 것은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합니까?

요한계시록 13절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밧모섬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증언하면서 말씀을 읽는 자, 듣는 자,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와 반응이 우리의 신앙의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성은 말씀을 읽고 듣고 순종하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읽고 있습니까? 귀를 기울여 듣고 있습니까? 말씀을 순종하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도 없으며, 상관없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에게도 관심이 없으며, 상관이 없는 삶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복을 받고 누리며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세대를 무엇을 통해 말씀하셨습니까?

16절은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라고 합니다. 세대는 동일한 시대에 생각과 행동을 같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비유는 천상의 진리를 지상의 것을 가지고 설명하여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비유로 그 세대를 설명하셨습니까?

16절과 17절은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장터에서 친구들을 불러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놀이는 결혼식과 장례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결혼식 놀이를 하면서 피리를 불었습니다. 그런데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장례식 놀이를 하면서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책망하신 것입니까?

18절과 19절은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는 것을 장례식으로,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신 것을 결혼식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그 세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회개를 선포해도 가슴을 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도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이 먹고 마시지 않는 것을 지적하며 귀신에 들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 먹고 마시는 것을 탐하는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 세대의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믿지 않기 위해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하고 정죄한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에 관심과 반응이 전혀 없었습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에 전혀 관심과 반응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심과 반응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과 반응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지금은 회개와 복음에 관심과 반응이 있는 세대일까요?

그 세대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그 세대보다 더 관심과 반응이 없는 세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대를 무관심, 무반응, 무책임, 무기력한 세대로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듣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복음을 들어도 반응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할 책임을 다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할 기력이 없는 영적 기근과 상태에 있습니다. 이런 세대를 사는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복음에 대한 관심과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감당하며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대를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세대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결단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 생각할 때, 내가 원하는 교회가 있고, 우리가 원하는 교회가 있고,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이에 성도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왔으며, 사도들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 교회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사도행전 61절과 2절은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듣고 구원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도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일이 일어나자 사도들은 모든 제자를 불러 모으고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 성장하고 구제하는 교회가 원망하는 교회로 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사도들이 구제하는 일에 마음과 시간을 빼앗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도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교회에 두 부류의 성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짐이 되는 사람과 힘이 되는 사람입니다. 짐이 되는 사람은 나의 필요, 우리의 필요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무엇을 요구하며, 채워지지 않으면 원망합니다. 반면에 힘이 되는 사람입니다. 힘이 되는 사람은 교회의 필요, 하나님의 필요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요구하는 것보다 최선을 다해 헌신합니다. 짐이 아니라 힘이 되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무엇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원망하는 성도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헌신하며 감사하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들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사도행전 63절에서 6절은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고 합니다.

 

사도들은 교회에서 칭찬받는 일곱 사람을 선택하여 집사로 세웠습니다. 그들에게 구제하는 일을 위임했으며, 사도들은 말씀을 가르치며 기도를 인도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사도들만 헌신했으며 일반 성도들은 관심이 없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사도들과 성도들이 함께 교회를 섬기는 일에 동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선택과 위임과 집중과 동역을 통해 교회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칭찬받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은혜 충만, 믿음 충만, 지혜 충만,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세대를 극복하고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애곡하면 가슴을 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대를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기에 불안과 불평과 불편과 불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안은 기도로 삼고, 불평은 감사로 삼고, 불편은 변화로 삼고, 불만은 비전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악한 세대를 극복하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피리를 불면 춤을 추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첫째, 함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535절은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고 합니다. 악한 세대에 함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둘째, 함께 웃고 우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5절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합니다. 악한 세대에 기쁨과 슬픔을 공감해 주는 것입니다.

 

셋째, 함께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5절은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고 합니다. 악한 세대에 함께 교회를 세우며 함께 믿음이 성장하고 교회의 성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반응이 회개입니다. 복음에 대한 열매가 구원입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공감입니다. 사람에 대한 반응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혼자 변화하고 성장할 수 없습니다. 혼자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피리를 불면 함께 춤을 추고, 애곡을 하면 함께 가슴을 치며 변화와 성장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함께 복음을 전하고 함께 사랑을 하고, 함께 교회를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