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생각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3:1-7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의 차이는 무엇에 있을까요? 불행한 사람과 행복한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전부는 아니고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 기억의 차이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생각하고 기억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기억하며 고통스러워합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은 반드시 생각하고 기억할 것을 생각하고 기억하며 행복해 합니다. 혹시 잊고 싶은 생각과 기억은 무엇입니까? 또한 잊지 않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은 우리가 반드시 생각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나누었으면 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를 쓰고 난 후에 바로 베드로후서를 썼습니다. 베드로전서는 교회에 일어난 박해로 인해 흩어져 고난을 겪고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후서는 교회 안에 들어와 복음의 순전함을 해치고 있던 거짓 교사들의 미혹을 경계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을 권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후서를 기록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1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성도들의 기억을 뒤 살려 순수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려고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진실한 마음은 순전한 생각, 혹은 순수한 깨달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교회 안에서 순전하지 않은 생각, 혹은 순수한 깨달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2장 1절과 3절은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고 합니다. 그들은 거짓 교사들로 이단을 은밀하게 끌어들여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복음을 왜곡하고 훼손시켰습니다. 이에 그들을 따르는 자들은 온전한 신앙을 잃어버렸으며, 경건하지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베드로후서를 통해 복음의 순전함을 회복하고, 타락한 욕망에 사로잡혀 살지 않게 하도록 편지를 쓴 것입니다. 2024년 파리 올림픽이 지난 8월 11일에 폐막했습니다. 대한민국은 금 13개, 은 9개, 동 10개로 206개국에서 8위를 했습니다. 그중에 우리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이 놀란 것은 양궁과 펜싱입니다. 양궁은 전 종목 금메달을 땄습니다. 여자 단체는 지난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2024년 파리 올림픽까지 10번의 올림픽, 즉 40년 동안 금메달을 얻었습니다. 남자 단체 펜싱의 사브르는 올림픽 3연패로 12년 동안 1위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1위를 하고 금메달을 따기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더 쉽지 않은 일은 40년, 12년 동안 1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리며, 많은 유혹과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유튜브의 예람 워십의 찬양에 댓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 자라서 28년 동안 주님을 향한 저의 모습은 마치 철을 담금질하는 것 같았습니다. 뜨겁다가도 차가워지고 다시 진정한 마음인 줄 알았지만, 다시 식어버린 저는 지금은 다시 교회를 떠나 있습니다. 반복되는 암울한 현실을 신앙으로 버텨보려 하였지만 저는 무너졌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이 찬양을 다시 접하게 되었고 제가 신앙 생활 할 때 저를 많이 달래주었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뭔가 텅 빈 마음 한 켠에 남아 있는 마지막 촛불처럼 저에겐 느껴졌습니다. 이런 감동과 마지막 촛불을 남겨주신 찬양에 감사합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여전한 마음으로 변함없이 온전한 신앙을 지키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흔들리기도 하며, 넘어지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영적 부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침체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여전한 모습으로 예배와 기도의 자리를 지키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육체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일을 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악한 마귀와 육신의 생각은 온전하고 순전한 신앙 생활을 하지 못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2절은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게 하신 말씀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통해 명령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순전한 복음을 지키고, 온전한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의 능력이며,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는 영적인 검, 즉 하나님이 말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기억하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결코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록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며 부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생각하며 순전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엇을 알려 주셨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3절과 4절은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라고 합니다. 말세에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조롱하는 사람입니다. 조롱은 ἐμπαικτής(엠파이크테스)로 ‘업신여기는 것, 비웃은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조롱하고 비웃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강림의 약속, 즉 재림입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말씀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2절은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재림의 날을 영적으로 깨어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조롱하며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날과 시는 아무도 모릅니다. 도적이 미리 시간을 알려주고 오지 않는 것처럼, 재림은 홀연히, 갑자기 일어날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재림을 생각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기름이 덜어져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던 열 처녀를 생각하고 항상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순결한 신부로 사모하며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재림은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말세로 인해 일어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3절과 4절은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라고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에 단연히 하나님의 심판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만물은 창조된 그때와 같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일부러 잊으러 한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경찰이 없었으면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감옥이 없었으면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선하게 살아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다. 악을 행함으로 죄를 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죄가 드러나면 어떻게 될 것을 알고 있기에 경찰이나 감옥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일부러 잊으려고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의도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은 어떠했습니까? 6절과 7절은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이는 노아 시대에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보시고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이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실 것을 무지개 언약을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물이 아니라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은 것은 세상에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경건한 사람들만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아직 불로 심판하시고 멸망시키는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종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일이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서 15절은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불 못에 던져지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실 것입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실 것입니다. 악을 행한 자들과 의를 행한 자를 나누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에 심판과 사망이 아니라 상급과 생명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 수 있습니까?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경건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참여하는 자로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유혹과 미혹을 받을지라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여전한 신앙생활을 하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헌신할 수 있습니다. 어떤 박해와 핍박을 받아도 신앙이 순전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생각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기억하며 살고 있습니까? 반드시 말씀과 재림과 심판을 생각하고 기억하며 사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