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17:11-19 예화) 마지막으로 남길 말 독일의 암 병원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중년의 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혀에 암이 생겨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취 주사를 손에든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면서 “마지막 남길 말씀은 없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하면 말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수술실에 있는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심각하게 그의 마지막 말을 듣기 위해 침묵과 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만약 내가 이런 상황이라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암 환자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말은 ‘감사’였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은 감사입니다. 그 말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행복한 말은 ‘감사’입니다. 반면에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불행한 말은 ‘원망’과 ‘불평’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혹시 원망과 불평의 말이 습관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감사하지 못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음 주일은 맥추감사주일로 지키게 됩니다. 우리가 감사주일을 지키는 것은 감사한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음에도 감사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은혜를 고백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존 밀러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 가는 그의 감사의 깊이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행복과 감사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깊이도 감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깨닫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만, 받은 은혜를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맥추감사주일을 앞에 두고 지금까지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시간을 보내셨으면 합니다. 더 많은 감사를, 더 깊은 감사를 했으면 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받은 은혜에 대해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도전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셨습니까? 11절과 12절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그 당시 나병은 저주를 받은 병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전염성이 매우 강한 병이었기에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병에 걸리면 가정이나 마을에서 쫓겨나 생활을 했으며, 성전에 들어가 예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마을 사람으로부터, 유대교로부터 거절을 당한 존재로 비참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전해 주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 연약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질병만 아니라 때로는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관계적으로, 영적으로 아파하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때로는 낙심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시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으며, 거룩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그들이 안고 있는 육체와 마음과 관계와 재물과 영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13절은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율법에 나병환자는 일반인과의 거리를 백 보 이상 두어야 했습니다. 이는 약 30m~40m로 볼 수 있습니다. 그 거리를 유지해야 했기에 나병 환자들이 멀리 서서 부르짖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짖음을 듣고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14절은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율법의 규정을 따른 것으로, 나병에 대한 확진도, 치유의 선언도 모두 제사장이 했습니다. 열 사람의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러 가다가 자신들이 나병에서 깨끗하게 나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치유를 받은 것은 무엇으로 인한 것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부르짖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제사장에게 가는 순종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기도와 순종이 놀라운 역사를 경험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부르짖은 것은 기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믿음과 기도와 순종을 통해 거룩한 역사를 행하십니다. 이에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위대한 역사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나병에서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의 핵심은 무엇에 있습니까? 13절은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단어는 ἐλεέω(엘레에오)로 ‘긍휼히 여기소서,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일까요? 우리는 은혜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일까요?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 존재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은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합니다. 바울이 핍박자요 박해자에서 구원을 받은 것도 은혜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도 은혜였습니다. 더 많은 수고와 헌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은혜였습니다. 바울만 은혜로 사는 존재일까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사는 존재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부르고 감동을 주는 찬양 중 하나는 손경민 목사의 ‘은혜’입니다. 그 찬양을 함께 불러 보았으면 합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pZuW2CV0mXY)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그런데 은혜로 치유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5절과 16절은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 부르짖으며 긍휼히 여겨 달라고 한 사람들은 모두 나병에서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아홉 명은 예수님을 다시 찾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그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아홉은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은 후에 미련 없이 떠난 것입니다. 그들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모두 은혜를 받았으나 은혜로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은혜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기도 응답을 받은 것도 은혜입니다. 그것을 은혜로 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헌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예배와 기도와 헌신으로 연결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은혜를 잊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지속하는 데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병 환자들이 예수님께 나와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했던 믿음과 기도와 순종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기도와 순종은 더 깊은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합니다. 혹시 하나님이 은혜에 감격하며 감사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믿음과 기도와 순종은 어떠합니까? 믿음과 기도와 순종을 통해 더 충만하고 풍성한 은혜를 경험했으면 합니다. 더 깊은 은혜의 체험과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한 사마리아인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19절은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고 합니다. 그에게 일어나 가라고 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더 놀라운 은혜가 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이 치유된 것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은혜 받은 자에게 은혜를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아는 자에서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깨닫는 자에서 은혜를 고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고백하는 자에게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아는 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은혜를 받은 사람에 머무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더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고 더 깊은 감사의 고백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믿음과 기도와 순종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