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 창세기 50:15-21 오늘은 가정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전에는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을 나누어서 드렸지만, 요즈음 가정 주일로 어린이와 어버이가 함께 예배하기도 합니다. 현대 교회에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극복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은 교회와 가정을 잇는 신앙생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의 교육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의 교육과 생활을 통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며,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거룩한 고민을 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데즈먼드 투투는 ‘가정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가정은 하나님이 주는 선물이다.’라고 했습니다. 레프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다. 그러나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라고 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행복의 정원입니다. 그 정원에서 우리는 행복을 경험하고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종종 가정이 행복의 정원이라기보다는 불행의 정원인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까? 창세기 2장 18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모든 환경과 상황을 마련하시고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동물의 암수를 만드셨는데,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이셨습니다. 이에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돕는 배필은 ‘조력자’, 반려자’라는 뜻입니다. 조력자는 최선을 다해 돕는 사람입니다. 반려자는 배우자를 비유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짝이 되는 벗입니다. 즉 생각이나 행동을 함께하는 짝이나 동무입니다. 그런데 돕는 배필은 오직 아내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도 돕는 배필로 살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아내를 도와야 하며, 평생 생각이나 행동을 함께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행복을 경험하는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은 돕는 배필로 사랑하며 도우며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런 가정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창세기 3장 12절과 13절은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합니다. 하와와 아담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두려워 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와 불순종한 이유를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주었기에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불행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돕는 배필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비난하고 원망하고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하나님은 행복을 그려 주셨는데, 그들은 불행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까? 혹시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불행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가정에 서로를 향한 원망과 비난과 책임 전가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은 행복입니다. 불행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가정이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많은 이유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영적인 관점에 의한 이해입니다. 하나님은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마련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을 원하지 않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은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들짐승 중에 뱀은 가장 간교했습니다. 그 뱀이 하와를 찾아와 간교한 말로 미혹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했습니다. 그 결과 행복한 가정이 불행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 뱀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12장 9절은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고 합니다. 하와를 말로 미혹하여 죄를 범하게 함으로 불행한 가정, 불행한 삶을 살게 한 뱀은 단순한 뱀이 아니었습니다. 마귀, 혹은 사탄이라고 하는 존재로 온 천하를 미혹하여 잘못된 것을 선택하고 그 길을 가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행복한 가정이 불행한 가정으로 변하는 것은 단순한 가족들의 갈등에 있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악한 마귀의 간교한 유혹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기능의 가정 안에 있는 마귀의 간교한 유혹을 분별하고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영적 가정인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깨닫고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야곱의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야곱의 가정은 순기능적인 가정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그 가정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창세기 37장 3절과 4절은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고 합니다. 야곱에게는 두 명의 부인과 두 명의 첩에게서 낳은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요셉은 야곱이 노년에 낳은 열한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야곱이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이에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에게만 화려하게 장식한 귀한 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자신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보며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하는 말은 편하지 않았으며 말도 잘 건네지 않았습니다. 이 야곱의 가정에 나타난 역기능적인 모습은 무엇입니까? 편애와 갈등과 미움과 대화의 단절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편애했습니다. 이에 다른 아들들과 아버지 야곱과 동생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형들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동생 요셉에게 향했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말도 잘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불손한 말을 했습니다. 그 결과 형들은 요셉을 노예 상인에서 팔고 아버지에게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어떠합니까? 가족들 간에 서로를 만족하는 사랑이 있습니까? 서로 갈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시 갈등이 있어도 지혜롭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서로에 대한 미움이나 시기나 질투는 없습니까? 다정하고 친밀한 대화가 있습니까? 그런 역기능적인 현상은 하나님이 주신 가정에서 행복을 경험할 수 없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친밀한 관계가 있으며, 다정한 대화가 있는 가정입니다. 그런 가정을 꿈꾸며 세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가정이 요셉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으로 바뀌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에 의해 이루어진 순기능의 가정, 행복한 가정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요셉이 가나안을 떠난 후에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요셉은 많은 고난을 겪은 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야곱의 가정에 심한 기근과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요셉은 고난을 겪고 있는 아버지 야곱과 형들을 애굽에 데리고 와 고센 지역에서 살게 했습니다. 야곱은 나그네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께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형들은 혹시 아버지가 죽은 후에 동생 요셉이 자신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지 않고 보복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에 요셉을 찾아와 아버지 야곱이 죽기 전에 자신을 용서하라고 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19절에서 21절은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고 합니다. 요셉을 형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켰습니다. 형들만 아니라 조카들까지도 편안하게 살도록 돌볼 것이라고 위로했습니다. 요셉을 통해 볼 수 있는 순기능 가정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용서와 용납과 용기가 있는 가정입니다. 요셉을 형들의 악행을 용서했습니다. 그런 형들과 조카들을 사랑으로 받아 주었습니다. 나아가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용서와 용납과 용기입니다. 가족도 인간이기에 때로는 상처와 아픔을 줄 수 있습니다. 비록 가족이지만 나와 다르기에 받아들이기에 불편하고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런 행동을 하는 가족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은 미움이 아니라 용서를, 거절이 아니라 용납을, 좌절이 아니라 용기를 주는 가정입니다. 하지만 그런 가정을 이루기는 쉽지 않습니다. 요셉이 그런 가정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무엇에 있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그런 가정을 세울 수 있습니까? 첫째, 긍휼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17절은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고 합니다. 요셉은 형들이 두려워 떨며 하는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형들에 대해 긍휼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흘린 것입니다. 긍휼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가족을 대하면 용서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가족은 연약함과 상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으로 가족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20절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합니다. 요셉은 형들의 죄에 보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형들이 동생 요셉을 해하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꾸어 요셉만 아니라 가족 모두의 생명을 살리셨다고 합니다. 우연이 일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때로는 가족들과 갈등이나 다툼도, 상처나 고통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믿을 때 용서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가정의 주일에 이런 결단이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가정을 세울 수 있었으면 합니다. 또한 부모의 연약함을 극복하는 가정을 세울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역기능의 가정에서 성장했어도 순기능의 가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용서와 용납과 용기를 주는 가정을 세울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꿈을 꾸시는 우리의 가정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입니다. 그런 가정을 세우며 행복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행복이 있는 영적 가정인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