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에 순종합니다 요한일서 4:12-21 예화) 버려진 아이에서 빌 윌슨(Bill Wilson) 목사는 뉴욕 빈민가 아동들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는 ‘메트로 월드 차일드’ 주일학교 사역을 통해서 가난과 폭력 비행의 위험에 노출된 전 세계 10만 명의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어린이 선교 단체를 세웠습니다. 그가 이런 사역을 하는 것은 자신이 버려진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윌슨이 12살 때 집을 나가셨고, 알코올 중독자 어머니는 어린 윌슨을 길에 두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3일 동안 길에 앉아 물도 음식도 먹지 못한 채 어머니를 기다렸습니다. 하루를 기다려도 이틀을 기다려도 울며 어머니를 찾고 배는 고파 허기져서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데 삼일이 되어도 어머니가 오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윌슨의 곁을 지났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백혈병을 앓는 아들이 있었음에도 윌슨을 데리고 와서 돌보아주었습니다. 윌슨은 교회 캠프에 참석하여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 뉴욕 빈민가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교회학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총에 맞아 입원하기도 했고, 강도를 만나 부상을 입기도 했으며, 벽돌에 맞아 오른쪽 시력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윌슨이 사역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잊을 수 없었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우리를 순종의 자리에 나아가게 합니다. 어떤 시험과 고난이 올지라도 헌신의 자리에 머무르게 합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사랑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신앙과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한은 사랑과 순종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순종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숨길 수 없는 것이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홍역과 사랑입니다. 홍역을 앓게 되면 밖으로 드러나는 발진으로 인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홍역과 사랑은 모두 열병입니다. 홍역은 몸에 생기는 열병이며, 사랑은 마음에 생기는 열병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을 숨길 수 없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 받았다는 것을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증거를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나타나는 증거를 통해 구원 받았는지, 아니면 구원 받았는지를 판단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점검하고 구원 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내주하심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첫째,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그 누구도 육신의 눈으로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안에 게신 하나님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12절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고 합니다. 요한은 그것을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온전해 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4절과 15절은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고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세상에 구주로 보내신 것을 보았으며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확신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입술로 시인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실 뿐만 아니라, 그도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발견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고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줄 믿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6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께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구주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증거인 줄 믿습니다. 청교도 신학자인 토마스 야콥은 ‘성령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연합시키고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킨다’ 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신비한 연합을 이루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부터 시작되며 그것을 지속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13절에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고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내주하는 것을 아는 것은 인간적인 지혜나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적 확신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안에 계심에 대한 확신을 주시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내주하신다는 증거는 서로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 더 사랑하고, 더 견고한 믿음을 갖고,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은 믿음과 사랑이 있는 자는 하나님이 안에 거하시시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온전한 사랑을 베푸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17절은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도 온전한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완벽함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계속해서 수고함으로 성숙해지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의 날에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의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에 감사하고 우리도 온전한 사랑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온전한 사랑이 주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18절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결코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우리는 악한 마귀와 세상과 심판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죽음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온전한 사랑이 있는 곳에 평안과 안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담대하게 심판대 앞에 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근거와 출발은 무엇에 있습니까? 19절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곳에,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곳에 진실한 사랑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사랑이며, 희생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온전한 사랑이 있는 반면에 거짓된 사랑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랑은 무엇입니까? 20절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고 합니다. 거짓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형제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점검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어떠한지를 점검해 보면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21절은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온전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통해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 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하나님과 상대방에게 순종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교회를 존중해야 합니다. 순종을 통해 진실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